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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키즈(2018)

영화 속에 담긴 현실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9. 11. 23.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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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설치되어 1953년 7월까지 운영된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영화 속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다. 

 

     미국에서 흑인 해방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군대는 흑인이 살아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건네주던 몇 가지 되지 않던 사회 장치였다. 잭슨 하사(Jared Grimes)가 어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오게 되었는지에 관해 영화는 말해주지 않지만, 미국 사회의 당시 실정을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그가 왜 그곳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지와 피아노 연주와 탭댄스에 매료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음악과 춤은 살아야만 하는 세상과 살고 싶은 세상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잭슨은 그곳에서 자신과는 다른 상황에 던져졌지만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만난다. 북한 인민군 포로 로기수(디오), 중공군 포로 샤오팡(김민호), 포로수용소에서 복무 중인 미군에게 웃음과 몸을 파는 양공자가 되려다 그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 양판래(박혜수). 한국 민속춤에 정통했던 강병삼(오정세). 다섯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건 새로 부임한 수용소 소장(Ross Kettle)의 야심이었다.

 

     러시아 사람과 가깝게 지낸 덕에 러시아 민속춤을 멋들어지게 출 줄 아는 로기수는 잭슨 하사의 탭댄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에 매료했다. 중공군 샤오팡은 약한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춤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의 심장을 주체할 수 없게 뛰게 만든다. 한국 근대사의 네 갈래 길 정중앙에서 태어나 자란 양판래는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다. 이 네 사람을 하나 되게 한 건 탭댄스.

 

     김영철 감독은 한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한 시기로 손꼽히는 한국전쟁기를 남녀노소, 세대를 넘어선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음악과 춤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싶어서 영화「스윙 키즈」를 만들었다. 

 

     죽음과 다시금 지연된 삶, 이 두 가지 말고는 다른 어떤 선택사항도 찾을 수 없는 전쟁터 어느 구석에 세워진 포로수용소는 죽음과 다시금 지연된 삶을 벗어난 초월적 영역이다. 그곳에서만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오늘의 삶은 내일의 죽음이 잠시나마 다시금 지연된 상태일 뿐이라는 실존적 고백 앞에 사시나무처럼 떨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죽음과 삶의 역동이 정지된 공간이기 때문에 포로수용소는 무기력과 무감각이 암세포처럼 몸과 영혼에 침투한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춤판인 탭댄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흥겨워진다. 한국과 중국, 미국을 하나로 엮을 수 있었던 건 미국의 국방력이란 걸 감안할 때, 한국의 춤과 중국의 춤은 미국의 춤 탭댄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음 또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은 난생처음 성탄절 춤 공연을 마친 후 잭슨 하사를 제외한 네 사람이 사살당하는 장면이다. 이유는 춤을 췄기 때문이다. 춤을 췄기 때문에, 그들이 춤을 추는 도중에 누군가가 수용소 소장을 암살하려 했기 때문에,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미국에 반대하는 '공산분자'가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포로수용소 역시 한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할아버지로 변한 잭슨 하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렀다.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했고, 네 명의 포로에게 탭댄스를 가르쳤던 수용소 체육관에 들어간 그는 바닥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는 탭댄스 신발 발자국을 바라봤다. 몸을 낮춘 그는 오른손 바닥으로 발자국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직 잭슨 하사만이 무심한 사살로 삶을 마감한 네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하늘은 참 화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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