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첫잔처럼 (2019)

영화 속에 담긴 현실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9. 12. 14. 15:39

본문

첫잔처럼(2019)

     조달환. 세바시 15분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생각하는 배우, 인기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순간적으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것보다는 조금씩 천천히 꾸준하게 나는 법을 제대로 잘 배워서 날아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날 수 있는 배우가 되려는 자세가 말과 태도에서 느껴지는 배우였다. 그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가 「첫잔처럼」이었다.

 

     자기보다는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제약회사 영업사원 이(호연). 그래서 조금만 욕심을 내면 남들보다 앞서 갈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마는 이. 아버지 부재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일까? 그는 한 걸음 내딛는 방법을 잘 몰랐다. 사랑했던 여자 친구가 직장 동료와 결혼하는 걸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며 축하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드는 회사 여자 직원을 향해 말 한마디 대범하게 건넬 수도 없었다. 그런 그를 직장 동료는 술자리에서 재밌는 안주거리로 맛있게 요리한다. 

 

     그런 그에게도 선생님이 있었다. 자기를 신입사원으로 뽑았지만,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전 대표님. 전 대표님이 말했다. "내가 왜 밥을 사주는 줄 알아? 맛있게 잘 먹으니까. 그럼, 내가 왜 술을 사주는 줄 알아? 잘하라고. 열심히만 하지 말고 잘해. 잘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조금만 욕심을 내. 그럼, 자네는 최고의 영업 사원이 될 수 있어." 술자리에서 헤어질 때, 전 대표님은 자신이 입고 있던 넥타이를 벗어서 그에게 주었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한평생 모름이 불러온 '열등감'에 사람 앞에서 말하는 법을 잃어버리신 아버지. 어릴 때 내 눈에 아버지는 말수가 없는 조용한 어른이셨다. 조금씩 나이가 들고 몸과 마음이 자라자 그런 아버지는 무관심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아버지로 변했다.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니 내 아버지가 불쌍하게 느껴진다. 무한한 가능성이 아버지에게도 있었을 텐데, 누구도 그런 아버지를 알아봐 주지 못했고, 누구도 그런 아버지를 이끌어 주지 못했다. 노래를 참 잘하셨던 아버지. 고된 하루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시면 간단하게 몸을 씻은 후 장롱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하모니카를 부르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음정과 박자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날 그때 아버지가 느끼는 게 음정이 되었고 박자가 되었다. 그때만큼은 아버지가 자유롭게 보였다. 다른 사람 앞에서 주눅 든 걸 들키지 않게 만드셨던 무감정의 얼굴 표정은 그 순간 아버지 얼굴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그시 감은 눈. 하모니카에 불어넣는 바람의 양에 따라 들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던 눈썹과 눈썹의 움직임이 만들어 낸 아버지 이마에 그려진 음표. 그 아버지가 생각났다.

 

     영화 속 주인공 호연 속에는 내가 담겨 있었다. 욕심을 내야 하는데, 용기를 내야 하는데, 인정사정 보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날 때로는 힘차게 때로는 매몰차게 몰아주는 아버지가 내겐 없었기 때문일까?

 

    전 대표님 장례식장에서 사모님께 그간 빌려 썼던 전대표님 넥타이를 돌려줬다. 그런 후 호연이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먹던 약도 애써 끊으려 노력하면서 실패 또한 과정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실패. 나도 이제는 그만 두려워하고 싶다.

 

'영화 속에 담긴 현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끄러움 Shame (2011)  (0) 2019.12.25
조커 Joker(2019)  (0) 2019.12.25
피에타(2012)  (0) 2019.11.29
스윙키즈(2018)  (0) 2019.11.23
양자물리학(2019)  (0) 2019.11.18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