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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일, 난 그에게서 '상처 입은' 희망을 본다.

삶, 사람, 사랑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20. 3. 1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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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양준일

 

"여보, 양준일이라고 알아요?"

"네, 연예인이죠?"

"어떻게 알아요?"
"모르겠어요. 그런데 들어본 이름 같아요."

 

잠시 후 처와 나는 91년 양준일 씨가 처음 한국에서 가수로 활동을 시작할 때 불렀던 <리베카>란 노래를 유튜브에서 찾아 듣고 있었다.

 

"춤이 아주 독특한데요. 그런데, 자연스럽다. 아무 거리낌도 없고, 부드럽다. 자유분방함." 그가 내게 남긴 첫인상이었다.

유튜브는 친절하게도 양준일 씨가 부른 다른 노래 목록을 한 가득 보여줬다.

 

"이야, 이 사람은 안무가 따로 없네. 그 순간순간 안무를 만드네요." 내가 말했다.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보고 있으니까 그러네요."

 

       잠시 후 난 누군가가 유튜브에 올려 놓은 <슈가맨 양준일 편>을 찾아서 보고 있었다. 사회자 유재석 씨는 양준일 씨를 <슈가맨>이 찾는 연예인 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10대, 20대, 30대, 40대 관중이 양준일 씨의 공연을 본 후 즉석에서 소감을 전등불을 밝힘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지금 이 노래가 나온다면 인기 몰이를 할 수 있겠느냐는 가수 유희열 씨의 질문에 10대 아이 전원이 그렇다고 답했다. "시대를 앞서 간 가수"라는 수식어가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진솔한 사람 같았다. 플로리다 주 브랜든이라는 지역 한국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슈가맨> 출연 요청에 쉽게 응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2주만 비워도 다음 달 집 월세를 낼 수 없기 때문에 망설이다 슈가맨 제작진에서 상황을 설명했고, 제작진은 모든 걸 다 부담할 테니 출연만 해달라고 요청했단다. 그래서 한국에 다시 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2019년 12월 25일 JTBC 손석희 사장의 마지막 뉴스룸 인터뷰에 그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국에 처음으로 저널리즘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줬던 거목의 마지막 뉴스 인도 시간에 30년 만에 다시 가수로 돌아온 사람을 찾아왔다. '상징적'인 만남이었다. 양준일 씨는 손석희 씨를 사장님이라 부르며 고마워했다. 한국에 살면서 마음속에 맺혔던 아픔이 그가 자신을 소재로 삼아 진행했던 <앵커 브리핑>을 볼 때 살며시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고 감사했다.

 

       "양준일, 나의 사랑... 리베카"란 제목의 손석희 앵커 브리핑를 찾아봤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면 돌이 날아왔다.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는 것이 싫다며 비자 연장을 거부했다. 아마도 곡을 써주지 않아서 서툴지만 혼자 가사를 만들었다. 다들 몰랐고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을 순간이었습니다. 가수 양준일. 지난주에 <슈가맨>에 출연한 그는 90년대 초반 반짝 활동을 하다가 물음표를 남기고 사라진 대중스타였습니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간 탓이었을까? 그의 음악과 퍼포먼스는 그 시대에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단지 음악이 하고 싶었지만 한국 사회에 그가 설 곳은 없었고 결국 몇 곡의 히트곡과 궁금증만을 남긴 채 진정한 슈가맨. 그의 조용조용한 회고담 속에는 그시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손가락질하거나 아예 견고한 벽을 쌓아버리는 사회. 가혹했던 그 시절 탓에 몸짓과 손짓 하나까지 예사롭지 않았던 가수는 삼십 년이란 시간 동안 묻혀 지내야 했습니다. 한편 지금 이 노래가 발표된다면 인기를 모을 수 있을까? 십 대를 대상으로 한 질문에 전원 불이 들어와서 화제를 모았는데요. 지금 시대 또 다른 양준일이 등장한다면 과연 세상은 선뜻 환영의 불을 켜줄까?" 손석희 씨는 양준일 씨의 굴곡 많은 삶에서 한국 사회의 굴곡을 읽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10살까지 살다가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음악과 춤을 좋아했다. 존 트라볼타가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에서 춘 춤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았고 그의 춤을 배우려고 애쓰다 춤의 핵심은 선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가 <배철수의 잼>에서 말했다. 연예인이 된 계기에 관해 답할 때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 다녔던 조그만 한인 교회에 같이 다녔던 한인 1세대 미국 영화배우 오순택 씨가 "준일이 너는 연예인이 되어야 해."라고 말해줬다. 사심 없기에 진솔하면서도 용감하게 듣는 이를 당황케 하는 질문을 머뭇거림 없이 할 수 있는 가수 배철수 씨가 양준일 씨의 귀환을 지켜보며 선배로서 걱정 어린 마음으로 물었다. 인기몰이란 게 바람 잡는 거랑 비슷한데, 자기를 좋아해 주던 사람들이 다시 떠나고 나면 어떻게 할 거냐? 두렵지 않으냐? "전 하루하루를 너무 즐기고 싶고, 즐기고 있어요. 그리고 두렵지 않아요. 전 지금 당장도 다시 서빙 일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 말을 듣는 배철수 씨는 안도감과 만족감과 대견함이 골고루 섞인 얼굴 표정을 위아래로 겸허하게 움직였다.

 

       "양준일 신드롬"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단다. 미국에 살다보니, 전자매체 활용량이 높지 않다 보니, 양준일 씨의 귀환 소식을 거의 일 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이상했다. 그의 말에, 그의 노래에, 그의 춤에 나 역시 매료되다니. 이게 뭐지? 도대체 무엇이 내 관심을 이 사람에게로 끄는 거지. 가만 보자. 예상치 못했던 내 마음속 반응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그의 삶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실패와 포기. 그의 삶에는 실패와 포기가 가득해 보였다. 36년 간 지속한 군사정권이 한국 사회에, 한국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 놓은 반공주의는 북한만을 향해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와 다른 사람은 무조건 간첩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세뇌 교육은 사회 곳곳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논리로 작용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으로 건너가 자란 양준일 씨의 귀환은 한국 사회가 수용할 수 없었다. 음악이 마냥 좋았던 순수한 청년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논리에 서툴렀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음악과 공연 능력은 당시 사회 기저에 가득 쌓여 있던 불만과 불신을 집단적으로 쉽게 투사할 수 있는 쉽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먹잇감이었다. 가수였지만 가요계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생물학적으로 한국인이었지만 사회적으로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바나나'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한국 사회는 이민이란 제도적 장치를 사용하여 그를 냉대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바를 다 해보려고 노력했다. 양준일이란 이름으로 더는 한국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V2로 변신하여 <Fantasy>라는 노래로 한국 가요계에 다시 등장했다. "공중파 방송사에 출연은 할 수 없고 인기는 올랐다 내렸다 하는 걸 본 후에 제가 포기했어요."라고 그가 배철수 씨에게 말했다. V2는 그가 자기에게 정해준 두 번째 이름 My Version 2이었다. 현재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영어 강사로도 활동했지만 아이가 생기자 학부모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5년 전 살기 위해,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지행합일. 음악이 재밌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배철수 씨의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음악은 새로운 옷을 입는 거 같아요. 그리고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만질 수 있고 생각을 바꿀 수도 있어요." 두 시간가량 양준일 씨와 이야기를 나눠본 배철수 씨는 양준일 씨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양준일 씨는 똑같네요. 똑같은 사람." 무대 위에 서서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할 때나 무대 뒤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눌 때가 똑같다는 말이었다. 내심 또 사람이 다르면 어쩌지 하고 걱정도 했다는데. 68세. 음악계에서 올곧게 자기만의 길을 걸어온 배철수 씨가 내린 진단이었다. 공자 할아버지는 이상적 군사장을 지행합일이라고 말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배철수의 "똑같네!"라는 감탄에 난 공자 할아버지의 명언 "지행합일"이 생각났다.

 

       상처 입은, 그래서, 진주로 변한 희망. 앞으로 무슨 음악을 하고 싶냐고 배철수 씨가 물었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가 모두 외로움으로 힘들어 한다는 걸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그가 대답했다.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손석희 씨가 한순간에 대중에게서 잊힌 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냐고 물었다. 그 순간에 집착하면 할수록 힘들어지는 자신을 깨달은 후 그런 기억을 머릿속에서 비우기 위해 애쓰며 살았다고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그런 기억은 비우면 비울수록 다시 생겨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게 참 많이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50세 중년 남성 양준일. 아내와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창고 짐 정리와 음식점 종업원으로 살아가는 가장 양준일. 한때 가수가 되려 했고, 가수였기도 했지만, 소리 소문 없이 가요계를 떠나야 했고 소리 소문 없이 한국을 떠나야 했던 한 인간 양준일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굴곡 많은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느낌이 없다면, 관심도 가지 않을 거고, 대중이 관심을 쏟지 않으면 그의 귀환은 시작할 수 없었다.

 

       먼저, 10대 아이들은 50세 중년 가수 양준일에게서 새로운 어른상을 발견한다. 쾌쾌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한 이거 아니면 삶은 끝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공부와 공부를 통한 성공 사회 진출만을 강요하는 부모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어른이 나타났다. 자기보다 옷매무새가 더 멋지고, 자기보다 더 자유분방한 아빠를, 삼촌을, 이모부를, 고모부를 발견했다. 그런 어른이 있을까라는 희망이 <슈가맨>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10대 아이들은 지금 가수 양준일에게 우러러보고 싶고 닮고 싶은 새로운 어른상을 발견했다.

 

       20대와 30대 청년들은 내면속 거부감을 쉽사리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거 같다. 왜냐하면, 가수 양준일의 귀환은 한국 사회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사춘기 이후 마냥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던 지연, 학연, 금력의 중요성에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음악에 모든 걸 걸어봤던 사람, 그래서 실패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런데 다시 가수로 돌아온 사람. 쉽사리 이상화하기에는 지금까지 옳은 길이라고 믿어왔던 이상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새로운 한 인간 존재의 등장이다. 

 

       40대와 50대 어른에게 가수 양준일은 옆에 두고서 자주 만나고 싶은 친구 같다. 삶의 풍파에 수 백 번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꿈"이라는 요물, "희망"이라는 신기루를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온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다. 거기다 나만큼 힘들게 삶을 살아왔지만, 30년이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살 때 부른 노래를 지금도 멋들어지게, 아니 그때보다 더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친구가 존재함은 잠깐이나마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는 거 같은 환상을 맛보게 한다. 

 

       양준일 신드롬에 숨겨진 집단 심리. 일제 식민기 이후로 한국 사회는 끝없이 달려왔다. 끝없이 과거로부터 도망쳐왔다. 과거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된 채 살아가는 한국 사람에게 과거로부터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졌지만 오늘이 다시 끄집어 올린 한 사람의 등장은 그래서 개인적 문제로만 봐서는 안된다. 프로이트는 동시대 사람에게서 신경증을, 융은 정신분열증을 읽어냈다. 이들 이후의 심리학자들은 경계선 장애와 자기애 장애를 알아냈다. 정신적 외상 장애를 제외하면 자기애 장애 이후로 아직까지 신선하게 제기된 정신 장애는 없다.  작년 5월에 12년 만에 한국에 잠깐 다녀왔었다. 매번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공간이 있는데, 그곳은 지하철 안이었다. 열에 아홉은 전화기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보통 잠들어 있었다. 자기 내면을 제외한 모든 공간과의 단절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가 한국 사회 같아서 씁쓸했다. 자기 내면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내적 안전 욕구는 그때마다 채워갈 수 있겠지만 내적 안정감을 쌓아갈 수는 없다. 내적 안정감은 관계 속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양준일 신드롬은 암담했던 자기의 과거를, 슬픔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을, 사회가 강요한 실패와 포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 자신이 상처 입은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가꾸어 온 '진주'를 꺼내 보임에서 시작했다. 세월은 그의 몸을 갉아먹었지만, 세월은 그의 얼굴에 주름을 만들었지만, 세월은 그의 꿈과 희망을 꺽어내렸지만, 그의 해맑은 웃음과 초롱초롱 해맑게 빛나는 눈빛은 조금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의 웃음에서, 그의 눈빛에서, 그의 조금은 더디지만 여전히 자연스러운 선으로 채워진 안무 속에서 한국인은 지금 상처 입은, 그래서, 진주로 변한 우리 자신의 상처를 꺼내 들여다본다. 

 

난 그를 너무 좋아하지 않을 거다. 과유불급. 그래야 그가 조금씩 기억 속으로 걸어갈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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