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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이제 마흔이다.

삶, 사람, 사랑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9. 1.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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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 9일 대한민국 부산 어느 산부인과에서 난 태어났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39년이 흘렀다. 엄마 뱃속에서 보낸 1년도 나이로 쳐준다면 40년이 흘렀다. 공자 할아버지가 당신의 삶을 회상하며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나이 서른에 인생에서 어떻게 살지를 정했고 나이 마흔에 세상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단다. 10년 전 공자 할아버지보다는 늦었지만 마흔이 되기 전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싶었다. 마흔이 되기 전에. 마흔이 된 오늘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정신분석 교육과정의 일부로 만나는 정신 분석가 사무실로 가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뜻을 세웠나? 뜻을 찾았나? 내 마음속에는 뜻보다는 갈등이 많다. 이 좋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게 아직도 너무 많다. 뜻을 세우지 못했으니 주변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일상에도 한없이 흔들리며 산다. 내 마음속 사춘기 소년은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화산처럼 샘솟는 욕망과 열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고자 헤매고 있다. 지난 10년간 난 무엇을 하며 살았나?



공부했다.

2007년 미국 뉴저지 드류 신학 대학교에 입학하여 목회학 석사 과정에서 3년간 공부했다. 학교 근처 세탁소에서 주간 36시간씩 일하며 공부했으니 성적이 좋을 수가 없었다. 오전 6시부터 저녁 7시, 8시까지 세탁소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을 먹은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 숙제를 하고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서. 새벽마다 방바닥에 들러붙은 몸을 억척스레 일으켜 숙제했고 수업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을 읽어나갔다. 내 삶이 비참하니 삶 자체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삶에 비참함이 가득하다고 믿으니 나 자신도, 주변 사람도 싫어졌다. 짜증과 분노가 처를 향했고, 갓 태어난 첫째 아들 지누가 이유 없이 귀찮고 미웠다. 목회학 석사 과정 졸업을 앞둔 시점에 박사 과정에 지원했다. 실패했다.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때 처 이현민이 말했다. 딱 한 번만 해보자고.


종교 철학 석사 과정Master of Arts에 지원했다. 지원서는 따로 쓸 필요가 없다고 입학처가 알려줬다. 박사 과정 지원서를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단다. 지원비를 절약할 수 있었고 2년 동안 더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때 마침 세탁소 사장님이 일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이전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박사 과정 지원을 위해 일하는 중 틈이 나면 GRE 영어 단어를 외웠다. 자연스레 실수가 늘었다.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쉽게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았다. 처는 급할수록 천천히 가자고 부탁했다. 하늘의 도움으로 학교 도서관 일자리를 하나 잡을 수 있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중앙도서관과 감리교역사박물관을 오가며 일했고, 그 이후로는 감리교역사박물관 학생 직원으로 일했다. 하루 8시간 혹은 5시간 일했다. 일이 끝나면 중앙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했다. 생계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끝난 후에 곧바로 도서관에서 가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루 8시간 도서관에서 일해도 세탁소에서 일할 때처럼 몸이 축나지 않았다. 행복했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공부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산산이 조각났던 내 삶을 가득 메웠던 비참함이 희망으로 바뀌기 시작한 때가. 수업을 위해 읽어가야 할 책을 모두 다 읽어갈 수 있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영어 실력이 늘어났다. 안정효 선생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또 새겼다. 결국에 가서는 둔재가 천재를 이긴다. 무식하게 공부했다.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둔재가 되고 싶었고 둔재가 되라고 나 자신에게 명령했다. 처 이현민과 첫째 아들 지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공부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영어로 글을 쓸 수 없어 엉엉 울었다는 수기도 봤는데, 난 그런 적은 없다. 어렵게 글을 쓴 저자에게 욕을 했고 절대 안 질 거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읽고 또 읽었다. 이해될 때까지.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종교철학에서 종교심리학으로 전공 분야를 바꿨다. 로버트 콜링턴 교수님의 황홀경 자연주의Ecstatic Naturalism을 공부하다 그분의 철학 세계가 그분이 한평생 씨름하며 살아가는 조울증Manic Depression과 흡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이 방어기제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철학도 인간의 내면세계의 일부분임을 알았다. 그렇게 시작한 종교심리학. 마음껏 공부했다. 하고 싶은 걸 마음가는대로 공부했다. 남들은 박사과정 시작부터 졸업 후 진로를 위해 모색했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주의 섭리를 배우는 곳이라는 대학교University에서 내가 먹고살 기술을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미련한 생각이었지만, 지금도 난 내가 결심한 바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런 다짐에 덧붙여 현실이란 걸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지금 더 튼튼한 기반 위에 서있지 않을까란 생각은 가끔 한다. 아무튼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적은지를 알았다. 둔재가 천재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천재가 자기 머리를 믿고 어느 선에서 공부하길 멈추지만, 둔재는 자기 머리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공부한 바가 몸속에 쌓일 때까지 공부하는 걸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둔재였고, 지금도 둔재고, 앞으로도 둔재여야 한다는 걸 박사과정 논문을 다 쓴 후 깨달았다.



현민의 남편, 지누와 미누의 아빠가 되었다.

2017년 10월 27일 지누가 태어났다. 지혜 ‘지’와 조그만 성곽 ‘누’. 이 두 글자로 이름을 지어줬다. <<어린 왕자>>와 <<손자병법>>, <<생활의 발견>>, <<성경>>이 내 마음속에 남긴 잔상을 담은 이름이다. 지혜롭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고 자기 몸 하나 간수 잘하면서 살라고. 이제 지누는 11살이다. 지혜롭게 잘 자라고 있다. 이 아이 속에는 어린 시절 내가 숨어있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지만 부끄러움과 의기소침함으로 종종 머뭇거리며 누군가를 자기를 쑥 끌어다 무대 위에 올려주길 기다리는. 이 아이속에 숨어있는 곱디고운 보석이 빛을 발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2011년 6월 12일 미누가 태어났다. 지누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한 후 집으로 돌아왔더니 처와 지누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당시에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는 화장실과 세면실이 방 안에 있었다. 목욕한 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고 화장실 문을 끄고 조심스레 거실로 나오는데, 평안하게 잠든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이런 순간에 행복감을 느낀다는데, 난 자신에게 말했다. ‘광유야, 넌 XXX. 어떻게 이 두 사람을 먹여 살리려고?’ 둘째 아이 출산일이 가까워져 올 때 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를 낳아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고. 박사 과정에 합격했고, 장학금으로 학비는 전액 면제였다. 두렵지 않았다. 아름다울 ‘미’와 조그만 성곽 ‘누’. 지혜의 성 옆에 아름다움의 성을 하나 지어주었다. 미누는 아름답다. 형 지누를 닮아서일까? 그 아름다움은 녀석의 지혜로움으로 곱절이 된다. 개구쟁이의 천연덕스러운 웃음 뒤에는 날카로운 이성이 자리잡고 있다. 작년 겨울에 처음 시작한 레슬링. 첫 경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네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어제저녁에는 유도 기술 중 레슬링에 사용할 수 있을 법한 던지기 기술을 알려주는데, 내가 알려준 기술이 왜 레슬링에서는 써먹기가 어려운지를 나에게 설명했다. 녀석! 생각하면서 연습하고 경기했다. 긴장감으로 온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경기 순간에 어떻게 상대방을 넘어뜨릴지를 생각하면서 경기하고 있었던 거다. 첫 경기 후 왜 졌는지를 혼자서 생각했던 거다. 처와 난 유도를 4년째 수련하고 있던 지누에게 유도 기술을 사용하여 레슬링에서 깜짝 승리를 만들어 내길 말없이 기대했었지만 미누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즐겁게 하면 그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녀석은 자기가 아는 기술을 어떤 상대에 어떻게 써야 잘 먹힐지를 생각하며 레슬링을 배우고 있었다. 녀석이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지누와 미누. 이 두 아이는 나에게 아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고, 한평생 운전대를 붙잡고 외롭게 싸워온 내 아버지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의 따뜻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빠가 되었고, 나를 아빠라 부르며 행동하는 아이들 속에서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날 좋아하면 그런 내가 좋아졌다. 그리고. 이걸 알았다.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엄마가 필요하다는 걸. 혼자서는 이 두 아이를 결코 안정적으로 키울 수 없었기에 아내의 소중함을, 그녀가 우리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무진장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두 아이가 나를 키웠다. 그리고 이 두 아이가 나를 깨닫게 했다. 내 옆에서 나를 돌보며 우리 두 아이를 지금까지 보살펴 온 이현민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여자인지를.



다양한 교회를 경험했다.

지난 10년간 교회 여섯 군데에서 일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뉴욕 허드슨 밸리 감리교회에서 난 중고등부를, 처는 아동부를 담당했다. 2012년 여름 3주간 뉴욕 플래인뷰 연합감리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일했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그곳은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담임 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교회를 나왔다. 실패였나? 실패가 아니었다. 잘한 선택이었다. 얼마 후 뉴저지 초원 장로교회 교회학교 담당 전도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 후 다시 5년이 흘렀다. 조그만 교회였다. 그래서 약간 욕심을 냈다. 목사 안수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담임 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미주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전도사로 학교 근처에 그루터기감리교회를 세웠다. 4년간 교회를 꾸려나갔다. 목사 안수를 받아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목사가 되었다. 4년 내내 교인은 얼마 없었다. 처음 일이 년은 드류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해줬고, 그 이후에는 한 가정 혹은 두 가정이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왔다 몇 달 머물다 다른 교회로 떠났다. 초원교회를 나와 뉴욕 미드-허드슨 밸리 연합교회 영어 회중 담당 목사로 일을 시작했다. 5개월 일한 후 교회를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선택 또한 틀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음을 없다고 시인하고 인정하는 게 살면서 필요하다는 걸 온몸으로 경험했다. 작년 7월부터 뉴저지 연합감리교회에서 난 아동부 담당 목사로, 처는 유치부 담당 전도사로 일한다. 5년 만에 처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다. 지누와 미누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좋다. 큰 교회의 내부사정을 보고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 해야 할 일이 끝없이 있어서 좋다. 아마도 이 교회가 미국에서 내가 일한 마지막 교회가 될 거 같다.


지난 10년간 다양한 교회를 경험했다. 서부개척시대를 연상케 하지만 결코 그런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개척교회. 교회를 세울 곳은 땅 위나 건물 속이 아니라 사람 마음속이란 걸 알았다. 몇 가족이 모여 꾸려가는 조그만 교회. 주변에 큰 교회가 많지만 그런 곳보다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편안한 관계 속에서 예배드리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적당한 크기의 교회. 교회 크기가 적당해지면 담임목사의 욕망과 욕심은 하나가 된다. 더 큰 교회 만들기를 일생일대의 과제로 삼는 순간 마음속 문제는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 모여 교회가 만들어지는데, 사람이 수단으로 전락한다. 욕망과 욕심을 접은 담임목사는 얼마 후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났다. 큰 교회. 좋은 점도 있지만 물론 좋지 않은 점도 있다. 세심하게 관찰하며 배운다. 작은 교회는 변화에 민감하게 그래서 적절하게 반응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큰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변화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변화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만든다는 걸 큰 교회에서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그루터기교회를 꾸려가면서 목회자의 가장 기본인 설교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성경책을 아주 열심히 봤다. 매주 설교 준비에 노력을 쏟았고 땀을 흘렸다. 노스롭 프라이의 통찰이 틀리지 않다는 걸 깨쳤다. 성경은 진짜 거대한 암호Great Code였다.



내 삶의 한계를 인식했다.

2018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다 생각했다. ‘이제는 무언가 새로운 걸 추구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살았다. 나에게 주어진 걸,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이를 붙잡고 아주 열심히 씨름해야겠다.’ 내 삶의 종착지가 이제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다. 동시에 어떻게 하는지도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건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다. 무엇을 할지와, 그렇게 결정한 걸 어떻게 할지 둘 다 중요하다.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두 가지를 모두 다 잃는다. 목적과 수단은 그래서 하나다.



앞으로 10년?

이번 봄에 박사과정을 마치면 영어로 쓴 논문을 한글과 영어로 출판하고 싶다. 한국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속에 숨겨진 심리/사회학적 사실을 고발하는 글이라 싫어하는 이도 많겠지만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한국기독교에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에릭슨의 책을 번역하고 싶다. 한국 사회도 이제 정체성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증가하는 다문화가정은 한 나라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우리 선조가 사용한 이데올로기를 폐기 처분했다. 정체성을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설명한 그의 이론이 한국 사회도 필요하다. 작년 가을에 시작한 정신분석가 과정에 집중할 거다. 과정을 마칠 때 시기적절하게 뉴욕 정신분석가 자격증 시험도 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준비할 거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가족과 함께 세계여행을 떠날 준비를 차근차근 세워나갈 거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부모 밑에서 자라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어중간한 지누와 미누가 자신의 성안에 들어가기 전 끝없이 돌아가는 지구와 한계 없는 상상력의 세계를 경험하고 맛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떠날 거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새로운 삶에 또 적응해야 할 거다. 내가 아는 한국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는 걸 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형 에서와 화해한 후 다시 또 다른 여행을 떠났다. 인생살이. 마지막 순간까지 걷고 걷고 또 걷는 게 아닐까? 지누와 미누가 큰 어려움 없이 한국에 적응하고 한국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기도한다. 처 이현민? 나보다 훨씬 더 사려 깊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걱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내가 도와달라고 매달리지 않도록 주의해야지.



내 나이 마흔이 되는 날에 받은 생일 축하글 세 편

지누: Dear Dad, Thank you for being the best DAD!!!!!! Happy Birthday!! Dad is always Da best!! From your best son, Jinu.


미누: dad thank you being nice happy birthday


현민: 사랑하는 여보. 39번째 생일을 축하해요. 당신과 함께여서 더욱 감사하고, 늘 옆에서 든든히 버팀목이 되어 주어 고마워요. 한국 나이로는 40. 인생의 절반 쫌 안되게 살았네요. 하루 하루 작은 감사할 거리를 찾게 해줘서 고마워요. 늘 사랑하고 당신을 무지 아끼는 거 알죠? 당신이 내 남편이라서, 아이들의 아빠라서 난 행복해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 손잡고 함께 걸아갑시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참 존경합니다. 2019.1.9. 밤마다 뜨거워지는 여자. 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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