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그래, 실존론적 질문은 현실적 질문에 밀려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다. 신화적 세계관은 상상 속에다 가두어 두고, 종교적 세계관은 교회에 숨겨둔 우리에게 내가 누구인가를 묻고 대답을 듣기란 쉽지 않다. 누리망만 있으면 시간과 공간을 적어도 뇌 신경 세포에 강해지는 자극을 통해 극복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는 오늘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규정은 칼로 물을 베기만큼 어렵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보관하는 물건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인지 아는가?
똑똑한 손전화기다.
죽마고우가 한 친구 집들이를 위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더군다나 그날은 월식이 일어나는 날이었다. 옛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여 맛있는 고향 음식을 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타나는 월식도 보려고 했다. 저녁을 먹으며 특별한 주제 없이 분위가 흐르는 대로, 느낌이 오가는 대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한 사람의 제안으로 모임 중 걸려오는 전화와 문자를 공유하기로 약속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한 사람이란 걸, 진짜 친구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현대판 손전화기 진실 놀이이 시작했다.
그런데 즐거움을 위한 진실 놀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대와는 다르게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 사이에 긴장감만 안겨줬다. 한 친구에게 뜬금없이 전송된 문자는 그 친구가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아 꼭꼭 숨겨뒀던 비밀을 친구들 앞에 벌거숭이처럼 보여주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세상에 둘도 없다고 믿었던 친구가 실은 자기를 아주 재수 없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남편 몰래 내연 관계를 유지해 온 어린 시절 친구에게는 부인 외에 또 다른 여자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과 그 여자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친구의 아이를 뱄음을 또한 알게 되었다. 이혼 후 잘 다니던 학교 일자리도 그만둔 친구의 최대 고민은 재혼도 직장을 얻는 것도 아니라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 애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지금처럼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였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30년 지기 친구 중 알고 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적 공간
공적 공간
숨겨진 공간
영화는 조심스레 우리 각자의 사적 공간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하지만, 비밀로 숨겨둘 수밖에 없는 사적 공간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게 한 사람의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아내가 저지른 음주 교통사고를 대신 뒤집어쓴 남편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갈등을 잠깐이나마 통제하기 위해 아내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들고, 동시에 열 살 많은 여인을 애인으로 만들어 살고 있었다. 영화는 이 남자가 형성한 개인적 자아에 관한 윤리적 평가를 거부한다. 사적 공간은 개인 사정이기에 무관심이 약이라고 말하는 거 같다. 지행합일은 일찌감치 불가능하니 쓸데없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거 같다.
밥 먹다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도 전화기 식탁 위에 올려둘 수 있어?”
“그럼! 당신도 알다시피 내겐 전화할 사람이 너무 없잖아요.” 진심이었다. 그리고 나를 찾아주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은 삶. 다행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지 기사가 한 편 생각났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누구나 하나씩 가진 똑똑한 손전화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너무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손전화기 위치 추적 기록을 찾아보면 우리가 하루 동안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했는지를 단 1초의 공백도 없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면 손전화기 정보 기록과 위치 기록, 전송 및 수신 문자, 통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알지도 못했던 나에 대한 정보가 그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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