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는 「전태일 평전(2009)」이란 책을 통해 전태일 씨의 삶과 ‘사상’을 문서로 남겼다. 사상이란 단어에 눈이 갔다. 한글 사전을 꺼내 사상思想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뜻이 세 가지다. 간단하게 먼저 ‘생각’ 혹은 ‘의견’이 사상이란다. 둘째, ‘사고 작용의 결과로 얻은 체계적인 의식 내용’이 사상이다. 셋째, ‘사회나 인생 따위에 관한 일정한 견해’가 사상이다. 아무개의 사상이라 말하려면 아무개는 제법 사회적 지위와 능력이 특출해야 한다. 전태일 씨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사상을 가질 수 있을까?
전태일 사상은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중략] 그것은 수천 권의 장서로 채워진 서재에서 커피를 마셔가며 정교한 개념과 논리를 구사하여 유려한 문체로 서술된 사상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미칠 듯한 격정에 교란당하면서, 머릿속에 터질 듯이 맴도는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개념을 잡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며 서투른 어법으로 띄엄띄엄 뱉어낸 외마디 소리들의 집합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전태일 사상은 그 어떤 고명한 철학자의 다변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감동적인 진실을 담은 사상이다. (196∼197쪽)
신문팔이, 구두닦이, 담배꽁초 줍기, 여름이면 아이스케이크 장사, 비가 오면 우산 장사, 새벽에는 손수레 뒤밀이. 전태일이 열여섯 살에 서울에서 살려고 한 일이다. 그 당시 서울의 상황을 작가 조영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들과 팔다리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날마다 몰려드는 곳이 서울이다. 땅 잃은 농민들, 흙에 묻혀 아버지 어머니가 겪었던 무지렁이의 삶을 이어받기를 거부하는 젊은이들, 일자리가 없어서 멀쩡한 팔다리를 갖고도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는 실업자들, 그밖에도 살길을 잃은 가지가지 사연의 사람들이 특권과 부귀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하여 그들의 지친 발길을 최후의 종착지인 서울로 돌린다.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발걸음은 이렇게 해마다 서울로 향하였고, 서울의 판자촌, 뒷골목, 이른바 ‘우범지대’는 때려부숴도 때려부숴도 더욱 늘어만 갔다. (16쪽)
재봉사였던 아버지 일을 거들며 어깨너머로 배웠던 재봉틀 기술로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재봉사 보조로 일을 시작하여 몇 년 후 재봉사가 되었다. 하지만, 평화시장에서의 삶으로 인해 그는 사람됨을 거부당한 채 닭장 안에 갇힌 닭처럼 일해야만 하는 노동자의 현실에 가득한 모순을 발견한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의 재봉사 보조는 하루 14시간 막노동 대가로 50원을 벌었다. 한 달에 휴무일은 이틀. 5년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한 노동자는 거의 다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기관지염, 인질, 빈혈,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노동자 중 8할을 차지하는 젊은 여자는 어머니가 되기 위해 타고난 여성의 기능에도 문제가 생긴다.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동 현실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가난하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는 현실. 더욱 나은 미래를 꿈꿀 가능성이 사라진 오늘에는 어떻게 또 하루를 버텨낼지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평화시장에서 인간은 물질로 변했다. 비인간화와 인간소외 현상이란 비극을 전태일은 피부로 경험했고 고된 노동으로 인해 몸 곳곳에 생겨난 고통을 통해 깨달았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었던 전태일은 스물두 살에 자기 인생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기까지 인생 계획을 네 번 수정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그 해결을 위해 택하려던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그 자신이 재단사가 되어서 재단사의 지위를 이용하여 함께 일하는 어린 여공들을 돌봐주는 것. 말하자면 온정주의적 방법이다.
둘째는,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기업주와 노동 당국에 진정을 하여 그 시정을 호소함으로써 근로기준법이 준수되도록 하려는 것. 말하자면 진정주의라 할 수 있다.
셋째는, 바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시범업체를 설립하는 방법이다.
넷째는, 노동자를 억압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명백한 투쟁대상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필사적으로 항의 투쟁하는 것. 이것은 1970년 가을의 투쟁에서 택하게 되는 방법인데, 말하자면 적극투쟁주의라고 할 수 있다. (227쪽)
스스로 힘을 키워 힘닿는 한 다른 이를 도와주려는 시도는 업주와의 마찰로 실패했다. 노동 당국에 노동자의 노동실태를 알리려는 시도는 정부와 업주가 형성한 부정과 비리의 방패를 부술 수 없었다. 그래서 꿈을 꾸었던 것일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시범업체를 설립하려 했다. 꿈과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현실 논리에 근거하여 돌아간다. 전태일 씨는 할 수 있는 게 더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현실은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래도 넘어야만 했다. 태산과 같은 산을. 운명을. 슬픔과 분노를. 심층심리학에서는 자살을 행위 속에 자신을 죽임으로써 실은 자신이 싫어한 모든 걸 파괴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본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자신의 온몸을 불태우며 전태일 씨가 했던 말이다. 상상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얼굴에 붙은 불이 그의 입안까지 태워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게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 기록이다. 말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말하려고 입을 열었고 그 입에서 우물거리며 흘러나오듯 뱉어진 세 문장을 많은 사람이 정의와 평화를 수호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인용했다. 생존본능을 극복한 채 그는 함께 일했던 노동자들을 위해, 달걀로는 깨지지 않았던 정부와 업주의 결탁을 향해, 인간성을 말살하는 그가 살았던 삶의 현장을 향해 외쳤다.
“배가 고프다.......”
병원 침대에 누워 삶을 거두기 직전에 그가 한 말이다.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배고픔을 느낀다는 사실 앞에 몸서리쳐졌다. 전신에 화상을 입어 팔다리는 움직일 수 없게 굳어버렸는데, 배가 고팠다. 뭐라도 먹고 싶었을 텐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죽었다. 전태일은. ‘산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나에게 물어야 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하나?’라는 질문은 차마 부끄럽고 겁이 나서 묻지 않았다.
황석영, 「삼포 가는 길 (1973)」 (0) | 2018.02.26 |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명상록Meditations」 (0) | 2018.01.05 |
안도현의 「연어 (1996)」 (0) | 2017.12.28 |
김훈의 「공터에서 (2017)」 (0) | 2017.12.27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2016)」 (0) | 2017.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