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함이 허무함과 함께 찾아올 때가 있다. 마음 한 켠에서 꿈틀거리던 무의미함은 어느새 늪으로 변해 나를 끌어내린다. 일상이란 무한 반복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 어디에도 내가 편한 마음으로 잠깐이라도 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만 절감할 때가 있다. 혼잣말이 잦아지고, 내가 나에게 하는 말에 섬뜩 놀라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가 타인으로 변해 내 앞에 서 있기를 바랄 때가 있다. 그런 날 보게 된 브라질 영화 한 편의 제목은 〈광기의 중심에서 Nise: The Heart of Madness〉였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영어 자막을 켜 놓고 감상했다.
한 여자가 철제로 된 벽 한 편에 달린 현관문으로 걸어간다. 문 앞에 서서 주먹으로 철제문을 쿵쿵 두드린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린다. 역시나 아무런 응답이 없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더 힘차게 문을 두드린다. 역시 묵묵부답이다. 약간은 화가 나서 사람이 나올 때까지 과감하게 멈추지 않고 철제문을 두드린다. 그제야 경비원으로 보이는 제복차림의 한 남자가 철제문을 열고, 아침 난동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확인한다. 1966년에 바히라 연방 대학교에서 정신과 의사 학위를 수여받은 니제 다 실베이라Nise da Silveira가 부임한 페드로 II 정신병원 the Pedro II Psychiatric Hospital서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했다. 한 여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정신과 의사 진료 연구실에는 남자 의사들만 자리하고 있었다. 니저는 당시 몇 안 되는 여자 의사 중 한 명이었으며, 그녀를 환영하는 남자 의사는 한 명도 그곳에 없었다.
잠시 후 정신병자 치료를 위해 당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전기충격요법Electroconvulsive Therapy 시연이 진행되었다. 젊은 흑인 남자 환자가 남자 간호사 두 명에게 끌려와 강연자 옆에 놓인 침대 위에 강제로 눕혀졌다. 간호사들은 그의 손과 발을 침대 틀에 묵었다. 젊은 남자는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지만, 그곳에 앉아 있던 남자 의사들은 이를 단순히 미치광이의 발작 증세로 여길 뿐이었다. 니제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후 강연자는 마치 마술이라도 부리듯이 침대에 결박된 채 울부짖는 남자의 양쪽 귀 위에 전기 충격기를 가져다 대더니, 그의 뇌에 직접 전기 충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대표적인 정신질환자 치료법은 전기충격요법과 뇌전두엽 절제술lobotomy이었다. 정신질환자는 인간이 될 수 없는 특수한 종으로 구별되었고, 이들을 위한 사회적 해결책은 그들이 ‘문제’를 더 이상 일으키지 않도록 감정 능력을 망가뜨리는 게 자타가 공인한 치료법이었다.
정신병원에서 남자 의사 중 아마도 담당하지 않으려 했던 작업 요법occupational therapy 담당실이 니제의 일터로 정해졌다. 작업 요법실을 처음 방문한 날, 니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소였다. 낡은 가구를 내다 버리고, 먼지투성이였던 바닥을 쓸고 깨끗이 닦았다. 워낙 낡은 공간이라 큰 변화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런 후 정신병원 일정에 따라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환자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규율과 규제,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 가차 없이 내려지는 처벌에 억눌려 있던 환자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신병원에 입소한 이래 단 한 번도 자유롭게 놀아본 적 없는 환자들을 니제는 입고 있던 스타킹 한 짝에 한 환자가 어깨에 걸고 다니던 헝겊 조각을 말아 넣어 축구공을 만들어 어떻게 공을 차며 노는지를 보여주며 놀이로 초대했다.
작업 요법실로 환자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하자, 니제는 함께 일하던 두 간호사에게 환자를 "환자(patient)"가 아닌 "손님(client)"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녀는 그곳에 찾아오는 이는 고치고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성껏 보살펴야 할 대상임을 강조했다. 손님을 정성껏 대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니제가 말했다: “손님이 하는 말을 듣고, 관찰하세요. 그리고 입은 꾹 다무셔야 해요. Listen, observe, and shut up!” 이 세 가지 방법보다 더 극진히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 있을까? 처음 만난 누군가에 관해 제대로 잘 알고 싶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들으면서 그 사람의 몸짓과 느낌을 관찰하기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참아내면서.
그 시점에 니제는 두 가지 운명적인 만남을 경험한다. 하나는 그녀의 40번째 생일을 맞아 남편 마리오가 선물로 준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의 책 한 권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남자 간호사 알미얼 마빙니얼Almir Mavingnier였다. 융의 책을 통해 니저는 인간의 정신 체계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내재하고 있으며, 이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침 그 무렵, 간호사 알미르가 니제에게 작업 요법의 하나로 환자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칠 수 있을지를 제안했다. 무질서한 선과 점 이외에는 스스로를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했던 환자들은 점차 선을 통해 사물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점을 사용해 감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점은 원이 되었고, 원은 다시 마음속에 자리 잡은 대상으로 변해갔다. 환자들은 삶 속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대상과의 상호작용이 마음속에 남긴 흔적과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니제는 환자들이 더 풍부하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정신병원에 애완견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애완견은 환자들에게 감정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상이 되었고, 이는 그들의 심리적 치유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 정신과 의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던 니제 다 실베이라(Nise da Silveira)는 시대를 앞선 생각과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했다. 그녀가 마음에 품었던 정신요법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 환자를 ‘환자’로 보지 않고, 나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 둘, 정신 질환의 발현은 자기 표현 결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셋, 환자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삶 속에서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애착 관계를 동물을 통해 대체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내가 5년간 배워 정신분석가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얻은 모든 지식을 세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니저의 세 가지 정신요법이 된다.
영화는 니제와 행한 면담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영화 속 니제가 아닌 꼬부랑 할머니 실제 니제가 말했다: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힘차게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요.”
우리 각자는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찾았다면, 힘들지만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There are 10 thousand ways to belong to life and to fight for your own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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