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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dhi (1982)> - 네가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이냐?

영화 속에 담긴 현실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24. 2. 3.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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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형성할 때, 인도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분열과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여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로 분리 독립했다. 한 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 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이사 자금이 없는 이들은 살던 곳에 계속 머물러 살아야 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서로 암묵적으로 지켜왔던 합의가 순식간에 폭동과 살육으로 변한 시기는 분리 독립이 완성된 시기와 맞물린다. 특히나 대도시 캘커타Calcutta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 1947년 9월에 간디는 캘커타에 있는 한 가정집에 들어가 종교 간의 분쟁과 살육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금식 기도를 시작했다. 그때 간디의 나이는 72세였다. 런던 대학교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에서 함께 공부했던 미국인 친구가 방송 기자로 자기를 찾아왔을 때, 간디의 종교적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난 이슬람교도이자 힌두교도야. 시크교도이기도 하고 기독교인이면서 유대교인이기도 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진행 중인 내전을 중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기도하다 삶을 마감하겠다는 72세 할아버지의 금식 기도는 인도에 종교적 평화를 가져다줬다.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Noviolent Resistance and Civil Disobedience 운동으로 영국으로부터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던 인도가 낳은 현인 마하트마 간디는 1948년 1월 28일에 뉴 댈리New Delhi를 방문할 때마다 머물렀던 숙소 벌라Birla House에서 기도 모임을 인도했다. 수많은 사람이 간디를 보기 위해, 간디와 함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때 나투람 갇세Nathuram Godse이 간디를 향해 쏜 총알 세 발은 표적을 빗나갔고, 그의 암살 시도는 수포가 되었다. 이틀 후 간디는 다시 만인을 향해 대문을 활짝 열고 다시 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 후 나투람은 총알 세 발을 간디의 가슴에 정확하게 쏘아 암살 작전을 성공시켰다. “오, 하나님! 오, 하나님!” 간디가 세상을 향해 남긴 마지막 말이다.

 

영국의 지식 계급인 변호사에서 인도의 평민으로

간디는 런던 대학교에서 법과 법리학을 전공했다. 그의 꿈은 대영제국의 법을 신성하게 수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변호사로 부임한 남아프리카South Africa로 이동하기 위해 오른 기차에서 간디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경험한다. 변호사 신분을 생각하여 일등석 칸에 앉은 그를 기차 승무원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다음 역에서 그를 강제로 하차시켰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쓰러져 있는 그를 기차에 타고 있던 백인들은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영국 시민이지만, 본토가 아닌 식민국에서 태어난 자기는 결코 영국인과 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디는 그때 깨달았을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간디는 몇몇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는 인도인 대표단Indian Congress Party of South Africa을 조직하여 종교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동포 간의 연합과 화합을 도모하려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영국 산하 경찰 기관의 방해로 실패한다. 영화의 다음 장면은 고향 인도로 돌아가는 간디의 모습이다. 그토록 꿈꾸며 준비했던 변호사직을 그만두고 고향 인도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그의 마음에 가득했던 고뇌와 번민을 3시간 11분짜리 영화 《간디Gandhi》는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건드릴 수 없었을 거다. 우리는 한 개인이 마음에 품은 채 고심한 사항이 무엇인지를 그게 행동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간디, 낯선 나라, 인도를 여행했다.

인도로 돌아간 간디는 자기 고향 인도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런던에서 공부할 때 배운 대영제국의 역사는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고국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시절 수능 세계 지리를 위해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가볼 일도 없는 다양한 나라의 역사와 경제를 머리에 쥐가 나도록 외우고 또 외웠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고국이지만, 낯설고 먼 나라인 인도를 알아야겠다고 간디는 결심했다. 3,287,263 스퀘어 킬로미터에 달하는 인도 대륙을 끝없이 달리는 기차 위에서 간디는 그의 두 번째 순례 여행을 시작했다. 대영제국 국민의 삶과 문화, 교육을 직접 경험하면서 지배자를 우러러보고 닮고 싶어 하는 열망을 키웠던 여행이 첫 번째 순례길이었다면, 끝없이 펼쳐진 인도 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는 인도인을 발견하고 그들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은 그의 두 번째 순례길이었다. 지식인으로 살아온 자기 속에 가득했던 환상과 욕망의 허구성을 깨닫게 해 준 건 극빈한 상황 속에서도 올곧게 삶의 무게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대영제국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민족, 동포의 삶이었다. 진리(Satya; Truth)를 향해 나가는 실험터인 삶을 간디는 고국에서 발견했고, 진실한 삶은 진리에 생각과 말, 행동을 맞추고 살아가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고귀한 생각high thinking과 소박한 삶simple living 사이 조화의 필요성은 대영제국에서의 배움과 인도에서의 삶을 하나로 엮기 위한 간디의 처절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간디는 영국의 삶과 인도에서의 삶,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삶의 양태를 통합하길 원했다. 두 개로 분열된 자기 삶을 하나로 합쳐야 했고, 그래야만 두 가지 서로 다른 세계관을 충돌이 아닌 융합과 확장으로 통합하여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디, 독립운동가이자 영적 지도자로 변했다.

165센티미터의 키에 왜소한 체구를 지닌 간디는 어떻게 영국의 압제로부터 인도와 파키스탄을 구출했고 성별과 나이, 인종을 초월한 만인의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신임 변호사로 남아프리카로 가는 기차에서 인종 차별법을 어기고 일등석에 타고 있던 간디는 다음 정차역에서 짐과 함께 기차 밖 승강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음 역을 향해 출발하는 기차 안에 타고 있던 백인들은 하나같이 간디를 흥미로운 구경거리인 양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눈초리를 느끼며 간디는 상념에 빠졌다. 승강장에 던져진 간디는 공적 장소에서 자기를 내려놓으면 적어도 그곳에 있던 이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걸까? 비폭력non-violence(Ahimsa)은 간디가 생각해 낸 사회·정치적 변화가 초래한 다양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간디는 물리적 비폭력만이 아닌 생각과 말, 행동에서의 비폭력을 강조했다. 누군가로부터 폭력을 통해 억압받고 있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앙갚음이 아니라 부정하게 사용되는 폭력과 그 폭력 뒤에 숨어 있는 가해자를 세상에 고발해야 한다. 음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양지로 옮겨야 한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 양심과 도덕률에 대한 신리와 확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대영제국을 상대로 한 간디의 비폭력 전술은 대영제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다. 세계를 이끈다는 자부심에 휩싸여 사는 영국인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어두운 면을 만천하에 드러낸 건 폭력 앞에서 허무하게 밀려 넘어지지만 결단코 다시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는 간디의 비폭력 전술과 이를 믿고 따라준 300만 명이 넘는 인도인의 단결심이었다.

     

톨스토이 농장에서 인간의 진보를 꿈꿨다.

국빈으로 초대되어 대영제국에 가서 장관 람세이 맥도널드 Ramsay MacDonald를 만나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대영제국의 헌법을 개정하는 회의에 참여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간디가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가 세운 대안 공동체 톨스토이 농장Tolstoy Farm으로 돌아갔다. 자급자족self-sufficiency(Swadeshi)을 실천하기 위해 세운 공동체가 사회와 국가, 전 세계에 미친 영향력은 대영제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설계된 인도의 경제 구조를 개혁하려는 그의 의지에서 시작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걸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자립은 불가능하다. 한 나라의 독립은 그 나라 국민의 독립적인 삶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실천으로 옮겨진 공간이 톨스토이 농장이었다. 톨스토이 농장과 그곳에서 간디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만들어 간 공동체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300만 인도인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상징을 간절히 바랐다. 남아프리카에서 인도로 돌아온 후 간디가 택한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수련 self-discipline(Tapasya)과 자기 통제 self-control이라 할 수 있다. 간디는 개인과 사회의 변화는 한 사람의 자기 수련과 자기 통제에서부터 시작하고, 성숙한 정신력과 도덕성을 가지고서 각자의 나약함과 격정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나로 응집된 집단과 사회의 정신력과 도덕성은 사회와 국가를 성숙하게 한다고 믿었다. 인류의 안정과 복지Wealfare of All(Sarvodaya)를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간디의 꿈은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단순함과 소박함이 미개함으로 여겨지는 오늘, 보복과 응징 없이 부정의를 향해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걸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혹은 정신적 외상으로 간주하는 오늘, 정신력과 도덕력보다는 돈과 명예,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오늘을 사는 나에게 간디는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2024년 2월 2일(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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