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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중독과 자존감: 한국 사회 미투 운동을 통해 본 한국과 한국 사람

정신분석과 인생분석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20. 12. 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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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pe of the Sabine Women by Pietro da Cortona

1. 시작

미국에서 시작하여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상륙한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법계를 시작으로, 연극계, 영화계, 가요계, 종교계, 교육계에서 한국 여자들은 그동안 가슴 속에 꼭꼭 눌러 숨겨뒀던 아픔과 슬픔, 분노의 기억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존경했던 선생님에게, 따르며 배우고 싶었던 선배님에게, 자신의 미래를 이끌어 주리라 믿었던 지도자에게 당한 성추행과 성폭행이 마음에 남긴 상처를 세상에 드러냈다. 글쓴이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여자를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사용하고 버리면 그만이라는 왜곡된 남상 중심적 사고가 얼마나 한국 사람의 의속 속에 깊숙이 뿌리내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사고가 한국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을까? 500년 전 조선왕조가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한국에 들여와 500년간 사용한 유교 철학의 남존여비 사상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한국 전쟁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 정권이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한국 거주 미군을 위해 시작하여 국가 산업으로 확장한 집창촌(돈을 주고 여자의 몸을 정해진 시간 동안 대여하여 사용하는 곳)이 한국 남자의 성 개념을 이만큼 왜곡시켰기 때문일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용기를 내 고백하는 여자들이 가해자로 지목한 사회 각계 유명한 ‘능력 있는’ 남자 중 그 누구 한 명도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모두 피해자인 여자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능력 있는’ 남자는 양심도 남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또 다른 성범죄 피해자가 용기를 내 자신의 슬픈 과거를 고백했고, 그 고백은 또 다른 고백으로 이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대중 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여자들의 고백에 당황한 ‘능력 있는’ 남자는 급히 성명을 발표하여 사과의 뜻을 내비쳤고,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부터 글쓴이는 한국 사회 미투 운동을 두 가지 심리학적 이론을 사용하여 읽으려 한다. 한 번 두 번이 아닌 습관적이고 강박적이기까지 한 성범죄 가해자의 행동을 바라볼 때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중독. 먼저 중독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을 사용하여 성범죄 가해자 마음의 역동성을 읽어 보자. 두 번째 이론은 자존감이다. 습관이 되어 밥 먹듯 해온 자신의 행동이 걷잡을 수 없는 문제로 확대되자 ‘능력 있는’ 남자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던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 순간만 모면하려는 다급하고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명예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그들 속에는 낮은 자존감이 숨어 있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긍정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인 자존감이 사회적 능력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중독과 자존감. 지금부터 이 두 가지 심리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강박적으로 성교에 집착한 ‘능력 있는’ 한국 남자의 서글픈 치부, 어쩌면 우리의 치부를 살펴보자.

 

 

2. 중독

국립국어원 표준 대사전은 중독이란 단어를 세 가지 맥락에서 정의한다. 그중 중독에 대한 심리학적 정의는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이다. 중독이란 개념은 처음에는 의존증과 남용, 중독을 유발하는 물질에 국한해서 사용했지만 20세기 말에 이르러 술과 마약 같은 물질만이 아니라 인터넷, 오락, 도박, 성교 등 특정 행동에 과도하게 의존하여 남용을 거쳐 결국 중독되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견되자 행동 중독도 하나의 중독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미투 운동의 원인인 ‘능력 있는’ 남자들의 성교 집착 증세는 성중독으로 볼 수 있다.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중독을 정의하는 기준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와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독 판단 기준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만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존재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양한 견해와 관점을 확인할 때 공통으로 빈번하게 언급되는 사항이 있는데, 이 사항은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물질 혹은 행동에 대한 의존이 남용을 넘어 중독으로 이어졌다면 중독자의 신체는 해당 물질과 행동에 대한 내성이 증가했음이 틀림없다. 내성tolerance의 사전적 정의는 ‘약물의 반복 복용에 의해 약효가 저하하는 현상’이다. 포도주 한 잔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포도주를 한 잔 마셨다. 그랬더니 알딸딸한 술기운이 몰려야 쉽게 잠들 수 있었다. 그로부터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포도주를 한 잔씩 마시기 시작했다. 잠을 자려고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밤 평상시처럼 포도주를 한 잔 마셨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서 한 잔 더 마셨더니 약간 알딸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포도주 한 잔이 몸에 미치는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건 몸속에 포도주 한 잔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내성이 증가했다는 말이다. 술에 중독된 사람의 몸은 술에 대한 내성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한 잔을 마셨을 때의 묘한 느낌을 느끼기 위해 술중독자는 그렇게 죽어라 부지런히 술을 마신다.

 

          중독을 판단하는 두 번째 기준은 금단 증세다. 금단 증세withdrawal symptoms의 사전적 정의는 ‘알코올, 모르핀, 니코틴, 코카인 따위의 만성 중독자가 이런 것의 섭취를 끊었을 때 일어나는 정신ㆍ신체상의 증상’이다. 매일 아침 한 잔씩 마신 커피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를 실수로 거를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커피를 한 잔 구해서 마실 때까지 머릿속이 뿌옇다. 커피 속에 든 카페인이 일정량 이상 지속해서 우리 몸속에 쌓이면 우리 몸은 카페인에 적응한다. 카페인에 적응한 몸은 그 순간부터 카페인을 우리 몸의 일부분으로 인식한다. 그러다 카페인이 몸속에서 사라지면 몸은 신체 일부분이 사라졌다고 인식하여 위험 신호를 보낸다. 커피의 경우 금단 증세는 무기력감인데, 커피를 마셔 카페인을 섭취해야만 이 무력감은 잠깐 다시 사라진다. 술 혹은 마약에 중독된 경우 금단 증세는 훨씬 강력하고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물질 혹은 행동에 대한 내성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금단 증세의 강도 증가로 이어진다.

 

          중독을 판단하는 세 번째 기준은 뇌 기능 손상에 따른 강박성compulsivity 증가다. 물질 혹은 행동 중독 여부를 가장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좋은 기분을 유발하는 물질과 행동을 즉각적으로 취하거나 행하지 않고 잠시 보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다. 당장 술을 마시지 않으면 미칠 거 같다는 사람, 시간과 장소를 가르지 않고 성행위에 집착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능력이 현저하게 약하다. 이 기다리는 능력을 관장하는 신체 기관이 대뇌 피질이다. 대뇌 피질의 주요 기능은 언어 사용, 추론, 추상적 사고 능력이다. 이 능력의 정반대 극단에는 본능, 충동, 강박성이 놓여 있다. 언어를 사용하고,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주어진 상황에 근거하여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는 인간은 사실 대뇌 피질이 원활하게 기능할 때 존재한다. 술이, 담배가, 마약이 두뇌를 파괴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을 거다. 신경생물학은 강박적 행동 또한 대뇌 피질을 파괴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곧, 중독 현상은 대뇌 피질, 인간을 인간 되게 해주는 유일한 신체 기관을 파괴한다. 대뇌 피질이 파괴되면 ‘인간다움’ 또한 사라진다. 인간다움이 사라지면 본능, 충동, 강박성에 사로잡힌 우리만 남는다.

 

          중독을 판단하는 네 번째 기준은 경제력 상실이다. 내성 증가와 금단 증세로 힘들어한다면, 이미 대뇌 피질은 정상이 아니다. 대뇌 피질이 망가지면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에 문제가 생긴다.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은 해야 할 일을 제때에 잘 할 수 없다. 노동력을 돈과 교환하는 일은 자기 제어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일할 수는 없다. 특정 물질과 중독 행동에 중독된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했기에 통제력과 제어력이 요구되는 건 뭐든 제대로 할 수 없다. 중독 물질과 행동을 지속하려고 중독자도 일자리를 구한다. 하지만, 근면하고 성실하기 위해 필요한 내면의 힘이 없기에 꾸준하게 일할 수 없다.

 

          중독을 판단하는 마지막 다섯 번째 기준은 인간관계 상실이다. 중독 물질 혹은 행동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 도박 중독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자신의 통장에 든 돈을 도박으로 모두 날린 이는 친구에게 전화한다. 친구 돈도 다 날리고 나면 형제, 자매에게 전화한다. 형제, 자매도 더는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부모에게 전화한다. 중독은 멀리서부터 가까이 있는 인간관계를 점진적으로 파괴한다.

 

 

3. ‘능력 있는’ 남자들의 성중독

이제 중독을 판단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한국 사회 미투 운동이 고발한 ‘능력 있는’ 남자들에 적용해 보자. 글쓴이는 그 ‘능력 있는’ 남자들을 성 중독자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습관이 되어버린 그들의 성교에 대한 강박적이고 위협적인 집착에서 행동 중독의 판단 기준인 내성 증가와 금단 증세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마음에 드는 한 여자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 때의 긴장감은 상당한 성적 쾌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그런 행동의 빈도수와 비례하여 줄어들고, 줄어든 긴장감은 줄어든 성적 쾌감으로 이어진다. 난생 처음 맛본 긴장감과 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능력 있는’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성교 빈도수와 강도를 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성의 증가는 자연스레 금단 증세 강도 증가로 이어진다는 걸 그는 알았을까? 내성/금단 증세 수레바퀴에 갇힌 그에게 강박적이고 위협적인 성교는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밥 먹듯이, 물 마시듯이, 잠자듯이, 그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해외 출장 장소가, 영화 촬영 장소가, 학회 모임 뒤풀이 식당이 순간순간 불끈 솟구치는 성적 충동을 해결하는 평범한 장소로 변했다. 물론 출장보다, 촬영보다, 모임보다 성교가 중요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출장 가듯이, 촬영하듯이, 모임을 하듯이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잠깐씩 가지고 놀아야 한다는 충동성이 출장만큼, 촬영만큼, 모임만큼 중요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 ‘능력 있는’ 남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동물성의 근원을 중독이란 심리학적 이론으로 분석했다. 그럼 이제 성 중독자임을 만천하에 알려지고 난 후 이 ‘능력 있는’ 남자들이 ‘능력 있게’ 한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진 행동 속에 숨어있는 원인을 분석해 보자.

 

 

4. 자존감

자존감은 심리학 용어 ‘self-confidence’이나 ‘self-esteem’을 한글로 표현하기 위해 만든 단어다. 그래서 한글 사전을 꺼내 자존감을 찾아보면 ‘자존自尊’이란 단어만 찾을 수 있다. 자존이란 단어의 뜻은 두 가지인데,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킴’과 ‘자기를 높여 잘난 체함’이다. 심리학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서로 다른 단어로 나누어 생각한다.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능력을 자존감感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높여 잘난 체하려는 욕망을 자존심心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자존심이 높은 사람은 자존감이 낮다. 반대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존심이 낫다. 즉,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괜히 자신을 높여 잘나 보이고 싶은 욕망이 적다. 인간 마음 건강에서 자존감의 중요성을 이론으로, 나중에는 한 가지 심리학파로 발전시킨 이가 있다. 하인츠 코헛. 1913년 5월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981년 10월 8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삶을 마감한 코헛은 프로이트가 인류의 마음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던 일과 사랑에 자존감을 덧붙였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내면에서 끝없이 샘솟는 종족보존을 향한 성욕을 발견했다면, 코헛은 성욕만큼 강렬한 인간의 자기애自己愛를 발견했다. 자기애란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망에서 생기는 자기에 대한 사랑’이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자기애란 자기 잘난 맛에 한껏 도취하여 살고 싶은 인간의 기본 욕구다. 코헛은 이런 기본적 욕구를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란 원초적 마음 상태는 두 가지 내적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사실을 끝없이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욕망the grandiose-exhibitionistic self이고, 두 번째는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며 우러러보고 닮고 싶은 대상the idealized-parental imago을 갖고 싶은 욕망이다.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게 바로 인간관계다. 그것도 그냥 인간관계가 아니라 이 두 가지 욕망을 적절하게 알아주고 채워주는 관계가 필요하다. 코헛은 이런 심리적 반응을 공감empathy이라고 불렀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코헛은 당연히 공감이라고 답한다. 공감을 통해서만 자기 잘난 맛대로 살고 싶은 욕망도 우러러보며 닮고 싶은 대상을 찾고자 하는 욕망도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공감은 동감과 다르다.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기’를 심리학에서 공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공감이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다른 이의 감정, 의견, 주장을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느끼는 척하는 건 공감이 아니다. 예를 들면, 잠에서 막 깨어난 갓난아기가 울 때 엄마는 의식적으로 아기의 울음소리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으면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와 몸의 움직임만 관찰하여 아기의 마음을 꿰뚫어 본 후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이게 공감이다. 코헛은 건강한 마음, 자존감의 기원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자라면서 경험한 공감적 반응empathic response에서 찾았다. 즉, 누군가 우리 마음 상태를 정성스레 어루만져주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그 경험이 마음속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며 자란다(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 내면화internalization라고 부른다). 배고플 때, 슬플 때, 무서울 때마다 누군가로부터 공감을 받았다면 그 공감은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요소가 된다. 공감적 반응을 충분히 받으며 자란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공감적 반응이 풍부하다. 조그만 실패에 민감할 이유가 없다. 큰 실패를 맛보더라도 태어나 자라면서 경험한 공감적 반응은 세상을 더욱 따뜻하고 푸근하게 이해하기에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침묵이 끝나면 항상 누군가가 다가와 자신을 어루만져주며 따뜻하게 말을 건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난도 격려와 충고로 승화시켜 생각할 수 있다. 비난보다 격려와 충고를 더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반대로 공감적 반응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란 사람은 자존감이 약하고, 자존심이 세다. 나약한 내면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에 화를 잘 낸다. 공감적 반응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이와 친해지면 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여 마음대로 조정하려 든다. 다른 이가 베푼 친절을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다. 고맙다고 말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공감이 부족한 텅 빈 마음으로 인해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래서 내면의 결핍을 외면에서 무언가를 취해 메꾸려고 노력한다. 과도한 열등감이 한순간에 과도한 전능감으로 변신할 수도 있다. 일반인보다는 연예인과 예술인에게서 이런 경우를 확인하기가 쉽다. 꽉 찬 마음속에서 넘치는 창조성이 아닌 텅 빈 마음을 다른 사람이 보내는 찬사로 메꾸려는 사람은 찬사를 찾아 끝없이 헤맨다. 찬사가 비난으로 바뀌면 그걸 참을 수가 없다. 비난을 건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근육이 미발달했기 때문이다.

 

 

5. ‘능력 있는’ 남자의 낮은 자존감과 성중독

사회 각계에서 ‘능력 있는’ 자로 등극한 남자들은 왜 성에 집착했을까? 자존감 이론으로 보면 원인은 낮은 자존감이다. 바꾸어 말하면 높은 자존심이 원인이다. 내면의 결핍을 외부로부터 쏟아지는 찬사로 극복했던 공감에 목마른 남자는 사회적 지위와 권위에 민감하다. 안타까운 건 인간은 적응의 귀재라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와 권위를 움켜쥐었지만 금방 그 상황에 적응한 ‘능력 있는’ 남자는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면의 결핍은 사회적 지위와 권위로 채워지지 않았다. 내면의 결핍을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물질과 행동을 사용할 수 있다. 몸과 마음에 좋은 물질과 행동을 사용하면 좋겠지만,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빈번하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인간은 쾌감을 추구하며 산다. 그래서 불쾌감을 주는 것보다는 쾌감을 주는 것을 쫓게 되어 있다. 우리 몸이 그렇게 진화했다. 성교는 쾌감에 해당한다. 그래서 내면의 결핍을 일시적으로나마 극복하기 위해 현대인은 성에 집착하고 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행동의 한 극단을 우리는 ‘능력 있는’ 남자들의 성교 집착증에서 확인했다.

 

          한국의 ‘능력 있는’ 남자는 사회적 지위와 권위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결핍을 종족 보존을 향한 욕구, 성욕으로 보충하려 했다. 한순간의 쾌락에 대한 집착은 의존으로, 의존은 남용으로, 남용은 결국 성중독으로 이어졌다. 한 여자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 때, 그 남자는 엄청난 우월감에 사로잡혔을 거다. 전지전능함을 찰나의 순간 맛보았을 거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한 시간도 지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헤맨다. 사냥은 습관이 되었고, 마음은 성노리개감 사냥에 중독되었다.

 

 

6. 끝

심리학은 개인의 내면세계를 관찰하는 학문이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의 내면세계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미투 운동은 ‘능력 있는’ 남자가 표상이 되어 한국 사회의 현 상태를 드러냈기에 글쓴이는 성중독과 낮은 자존감을 한국인이 현재 앓고 있는 문제로 상정했고, 한국 미투 운동으로 모두가 알게 된 문제를 특정 개인의 문제로 몰아세우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포용하는 자세를 독자가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며 글을 썼다. 지금 한국 사회가 많이 아프다. 후손에게 물려줄 희망이 사라진 사회, 즉각적 쾌감을 지연하는 능력을 상실해 가는 사회,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않으면 세상을 정지시키고 자신도 정지시키는 행동을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사회,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만 높아 문제 해결을 힘의 논리에 의지하는 사회, 그래서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든 사회. 비행기로 14시간 떨어진 미국 동부에서 사는 글쓴이 눈에 비친 한국의 현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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