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프랑스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에 맞서 싸웠지만 물러나길 거듭했고 결국 프랑스 항구 도시 됭케르크Dunkirk까지 후퇴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작전은 최대한 많은 인원이 됭케르크를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철수뿐이었다.
삶과 죽음이 끝없이 교차는 전쟁터의 긴박함을 영화는 최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흉내 낸 과도한 전쟁 상황으로 지누와 나의 감각을 자극하지 않았다. 등장인물 간의 침묵과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배경 음악으로 감각이 아닌 이성을 자극했다.
대한민국 해군 복무 시절 훈련소 수료 후 일 년간 살았던 광개토대왕함이 불현듯 생각났다. 적재 가능한 모든 미사일과 탄약을 배에 실은 적이 있었다. 북한의 습관적 도발이 예상 강도를 훨씬 넘어섰기에 전쟁 대기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소탕했다는 남해안에는 지도에 그려져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작은 섬이 많았다. ‘아, 이 조그만 섬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보이지 않는 전투함으로 전쟁터에서 함께 싸웠구나’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미사일과 탄약이 가득한 이름 모를 섬에 도착한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나누며 미사일과 탄약을 광개토대왕함에 실었다. 다시 평상시에 정박했던 부두로 돌아오자 부식 차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사일과 탄약, 부식으로 배를 가득 채운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총원 전투 배치’ 명령이 함내 방송으로 울려 퍼졌다.
매일 하던 연습과는 달랐다. 배에 오른 후 단 한 번도 쓴 적 없던 전투모를 쓰고 총기함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총을 어깨에 하나씩 멘 우리는 각자에게 할당된 경비 구역 혹은 전투 구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침묵이 끝없이 이어지던 대화를 몰아낸 건 그때였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누군가 우스개 소리를 던졌지만 받아주는 이는 없었다. 욕지거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정해진 대상이 불분명했으니, 그건 자신 혹은 팔자를 향했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서너 시간이 지났을 때, ‘전투 배치 해제’라는 명령이 들렸다. 모두 다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으로 화답했다.
영화에서 연합군 소속 군인은 모두 다 살고 싶어 했다. 내가 그랬듯이. 철수 명령으로 부두에 정박한 적십자 깃발이 내걸린 배에 모두가 다 오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배는 독일 공군이 떨어뜨린 폭탄에 맞아 부두를 떠나기 전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적십자 깃발은 공격 대상이 아니라고? 죽기 살기가 걸린 문제에서 적십자를 생각할 아량이 남은 사람은 이 지구상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바다에 빠진 군인은 부두 정박 명령을 기다리는 다른 해군 함정까지 헤엄쳤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살고 싶다는 본능은 그들에게 또 다른 힘을 공급했다. 가까스로 배에 오른 그들은 봉사자들이 준비해둔 빵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 날 밤 그 배는 독일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한 군인은 다시 육지로 헤엄쳤다.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고는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철수’라는 멋진 작전 이름으로 미화된 생존을 위한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한 군인은 총을 해변에 버린 후 홀로 바다로 걸어갔다. 여기서 독일군에 죽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해군 함정을 통한 철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군인들은 한 떼를 이루어 부대를 이탈해 해안가에 정박 중인 어선에 몰래 들어가 밀물이 될 때를 기다렸다.
연합군 공군 비행사는 하늘에서 철수 명령을 도왔다. 연합군 해군 함정을 침몰시키려는 독일 공군 비행기를 격침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독일 비행기를 한 대, 또 한 대, 격침했지만, 그들은 독일 공군의 표적이었기에 세 대였던 비행 분대는 두 대가 되었고, 한 대가 되었고, 마지막 한 대는 기름이 다 떨어진 순간 정박 중인 연합군 함정을 침몰시키려고 날아오는 독일 비행기를 한 대를 더 격침한 후 다시금 방향을 바꾸지 못해 독일군 점령지역 해변에 착륙했다. 독일군이 연합군 비행기를 나포하면 안되기에 스스로 비행기를 소각할 때, 그 비행사는 독일군에 잡혔다. 그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가 어떻게 되었을까가 궁금했다. 살았을까?
영웅은 만들어졌다. 모두가 생존본능에 사로잡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고, 운명의 장난에 휩쓸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았으니, 전쟁에서 영웅이란 사실 존재할 수 없다. 살았다면 운이 좋았던 거고, 죽었다면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렇지만, 연합군이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게 되자 신문에는 ‘철수 작전 대성공’이란 글귀가 신문 첫 장을 장식했다. 영웅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웅이 필요하기에 누군가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
영화를 반쯤 보던 지누가 말했다. “난 어렸을 때, 전쟁은 멋진 거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안 그렇네요.”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누는 스스로 전쟁의 실상을, 전쟁터에는 죽음 말고는 인간을 기다리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Nolan 감독은 과장 없는 전쟁 영화를 만들었다. 호이테 밴 호이테마Hoyte van Hoyteman 촬영 감독은 극적 요소를 배제한 그래서 너무도 극적인, 하지만 그게 극적인지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몰입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아빠, 이 영화는 말도 별로 없고… 어려웠어요. 이해하기가.”
“그래도 재밌지 않니? 아니, 재밌는 건 아니구나. 아빠는 참 감동 깊게 진지하게 봤는데.”
지누는 역시 솔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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