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하게 자라난 지극히 평범한 여자에 관한 영화다.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있는 둥 마는 둥 특별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랐다.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언제나 언니와 남동생의 흔적이 그 여자의 흔적을 가려버렸다. 자라나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가까스로 광고 관련 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자기만큼 평범한 남자였다. 평범한 여자가 평범한 남자를 만나 평범한, 그래서 평화롭고 안정감 있는, 가정을 꾸렸다. 시부모님의 등살에 못 이겨 딸아이를 하나 낳았고, 평범한 가정에 태어난 평범한 여자 아이는 평범한 남편과 평범한 아내를 평범한 부모로 만들어줬다. 평범해서 지적질받을 일 없었고, 평범해서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 수 있었다.
좋은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소중하게 가꾸어온 한 여자로서의 삶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했다. 세상이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가르쳤고, 살아온 환경이 그렇게 하는 게 바르다고 세뇌시켰고, 살면서 경험한 여인의 삶은 대부분 동일한 궤적을 따라 날아갔기에 자기 또한 그렇게 함이 마땅하다고 믿었다.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기에 태어난 딸을 위해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노력했고, 자기와 딸을 위해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위해 열심히 방청소하고 빨래하며 가정을 보살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자기 돌보는 법을 잊어버렸다. 아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돌보면서 한 번이라도 살아본 적이 있는지가 의심스러워졌다.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한켠이 바닥으로 쑤욱 떨어지는 느낌이 찾아왔고 이유 없는 서러움과 씁쓸함, 애석함에 눈물 아닌 눈물로 눈앞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웃으려고 노력했다. 웃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웃음과 웃음 사이에 미묘하게 따라오는 공허함의 무게가 점점 늘어갔다. 더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웃음 뒤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씁쓸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언제가 처음 시작이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누군가가 82년생 지영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음이란 구조물의 재료였던 할머니가 지영을 찾아왔고, 어떤 날에 어린 시절 마루에 앉아 대화했던 엄마가 되살아났다. 할머니가 하는 말인지,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인지를 구별하기 힘든 때가 찾아왔고, 엄마가 지영으로, 지영이가 엄마가 되는 순간 또한 심심찮게 발생했다. 어릴적 일이라고 흘려 넘긴 아픈 기억이 덩달아 하나 둘 생생하게 의식을 뚫고 수면 위로 부상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 내 마음에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해졌다.
누군가는 지영이 마음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빙의(憑依: 떠도는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옮겨 붙음)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우울증(憂鬱症: depression)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토속 의학 빙의와 서양의 정신의학 우울증이 합쳐진 이룬 정신 역동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다중인격장애(解離性正體性障碍;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이라고 부른다. 중요 원인은 자라는 과정 중에 축적된 정신적 외상 후 장애(발달론적 트라우마Developmental Trauma)로 볼 수 있다. 정신적 외상이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은 전쟁터와 수용소를 떠올린다. 주디서 허만은 명저 트라우마 Trauma & Recovery에서 전쟁터와 수용소 생존자의 마음 상태와 가정 학대, 성폭력 생존자의 마음 상태가 유사함을 다양한 연구 자료를 제시하면서 주도면밀히 지적했다. 82년 김지영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현실 또한 정신적 외상을 유발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신적 외상 발생 여부는 지극히 주관적 경험에 달려 있고, 주관적 경험은 동일한 상황을 인식하여 (정보로 바꾸어) 처리하는 개인의 독특한 삶의 방식임을 전제로 한다면 그렇게 읽을 수 있다.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지영은 엄마를 제외하면 그 누구로부터 진심어린 관심을 받으며 자라나질 못했다. 관심 밖에서 자라난 아이였기에 관심 밖에서 남동생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며 미래를 포기한 엄마의 상황을 다른 누구보다 세밀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자라서 엄마에게 효도할 거예요!" 초등학생 지영이가 두 고모를 향해 한 말을 생각해 보자. 미래를 위해 집에서 한참 떨어진 학원에 다니며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시간 고등학생 지영이는 버스 안에서 자기를 뒤따라 오는 남학생에게 붙잡혔다.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한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고, 연락을 듣고 달려온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지영이의 행동을 지적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원에 다녀서 늦은 시간에 집으로 오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위험에 노출했다. 입고 있는 치마가 너무 짧아서 남학생에게 음흉한 마음을 품게 했다. 당장 집 근처 학원을 알아보고 일찍 귀가해라. 죽다 살아난 순간이었지만, 지영은 자기가 무사함에 대한 감격이 아닌 자기로 인해 귀한 저녁 시간이 빼앗김에 대한 짜증스러움과 화를 아빠에게서 발견했을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지영은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몰랐다. 직장인 지영은 특별 기획부에 뽑히지 않았을 때 자기의 무능함을 먼저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만을 돌보며, 주부/엄마 지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소였다. 그리고 아주 잠깐 쪽마루에 나와 하늘을 바라봤다. 세상을 한없이 넓지만, 지영이가 살아야 하는 세상은 너무도 좁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행동하고, 잘 말하고, 잘 살아야 한다는 의지는 그를 하루에 감금했다. 그때였다. 자기 삶에서 자기를 아끼고 북돋아줬던 이들을 찾아 마음이란 미로를 홀로 헤매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들이 내가 되고, 내가 그들이 될 때, 난 지영일 수 있었다. 지영이란 아이를 지영이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 다른 이를 염려해서 힘듦을 참을 필요 없었고, 다른 이를 배려하여 일부러 한 번 더 웃을 필요 없었고, 다른 이를 위해 흐르는 눈물을 참을 이유 또한 없었다.
문학가 김지영은 다시 웃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문학가 김지영의 어깨는 활짝 펴져 있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 집단 신경증 '빨리빨리'는 지영의 혼란한 내면이 다시금 차분하게 가라앉는 장면을 속전속결로 해치워버렸다. 다양한 지영이들이, 분열된 지영이들이 다시금 지영으로 정리되는 장면을 조금이나마 살려낼 수 있었다면 더 재밌었을텐데. 상담은 결단코 쉬운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와의 정면 승부, 모든 가면을 벗어던져야만 시작할 수 있는 상담이란 진검승부는 15분 만에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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