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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먼곳에(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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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9. 11. 2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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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용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 남편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순이(수애)가 남편의 행방에 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정보다. 순이는 결혼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남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그런 남자와 결혼했을까? 이를 추측할 단서가 몇 가지 주어지지 않았지만, 남편이 3대 독자라는 사실과 남편이 베트남으로 떠났다는 걸 안 시어머니가  순이를 집 밖으로 쫓아냈고, 순이는 고향집으로 돌아갔지만 아버지의 불호령 때문에 다시 시댁으로 돌아갔다는 걸 염두할 때, 집안끼리 결정한 결혼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시어머니와 등쌀에 못 이겨 매달 남편이 근무 중인 부대로 찾아가는 순이. 그런 순이를 남편은 싫어했다. 면회 신청으로 인해 함께 부대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도 남편은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며 자기 앞에 차분하게 무릎 꿇은 아내 순이에게 싫은 말만 내뱉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해야 할 일을 차분하고 해내던 순박하고 참한 시골 여자가 순이였다.

 

     영화 「님은 먼곳에」의 주요 무대는 1971년 베트남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해설이나 분석을 찾아서 읽지 않는 게 내가 세운 영화 감상 철칙이다. 다른 이가 제시하는 관점에 사로잡혀 내가 살아온 삶과 그 속에서 쌓은 경험이 내 몸에 남긴 주름을 잃어버린 채 영화를 감상하고 싶지 않아서다. 눈앞에 놓인 현실은 내가 바라보기 전에는 현실이 아닌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고 내 앞에 놓인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분석한다는 걸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외동아들을 찾아 베트남으로 가려는 어머니를 만류한 후 순이는 베트남으로 떠난다. 어떻게 베트남에 가야 할지 조차 알지 못했기에 다짜고짜 육군본부로 찾아갔고 검문소를 지키는 헌병에게 본부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검문소 옆 벽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은 순이가 안쓰러웠던 헌병은 위문단에 소속하면 베트남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골에서 할머니 여럿과 함께 논과 밭에서 일하다 점심시간이 되면 휴식 중인 할머니를 위해 불렀던 노래가 전부였던 순이. 우여곡절 끝에 가수가 필요했던 한 무명 밴드와 손을 잡은 후 베트남으로 떠나는 원양어선에 몸을 맡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떠난 순이는 여행을 통해 삶과 자신에 관해 배운다. 할머니 말고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는 순이. 그런 그녀의 여성성을 활용하여 한 밑천 만들려는 무명 음악단. 미군 부대에서 난생 처음 오른 무대에서 순이는 도망친다. 그런 그녀에게 무명 밴드 대장은 매정하게 뺨을 때렸다. 그녀의 무능력함을 분명하고 냉정하게 가르쳐줬다.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는 남편을 찾기 위해 낯선 땅 베트남에서 음악을 연주해야 했고 노래를 불러야 했다. '순이'는 조금씩 조금씩 '써니'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자기 몸이 아름답다는 걸 알아갔고, 자기가 부르는 노래를 다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갔고, 자기도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꿈을 품어갔다. 

 

     돈을 벌기 시작했고, 노래를 부르며 다른 사람들과 호흡하며 놀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남편이 있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꿈이 현실로 들어나기 시작할 때, 써니가 속한 무명 음악단은 자신의 연주 무대가 실은 전쟁터 한가운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베트콩의 집중 포격으로 부대가 쑥대밭이 될 때, 모두가 자기 혼자 살고자 이리저리 도망갔지만 '써니' 속에 살아있는 '순이'는 음악단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친구가 포탄 조각에 다리를 다쳐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걸 목격하자 망설임 없이 달려가 그를 구해줬다. 음악단에게는 한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베트남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순이'는 '써니'의 모습으로 미국 부대에서 공연을 치렀고, 미국 부대장에게 실종된 남편을 찾기 위해 수색 명령을 내려주는 조건으로 하룻밤 동안 자기의 몸을 허락한다. 

 

     산전 수전 공중전을 뚫고 지나서 순이는 남편 김상길을 만났다.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반쯤 미친 상태에서 베트콩에게 총을 난발하는 김상길은 다른 선임자의 손에 끌려 후방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아내 순이를 만난다. 남편에게 다가간 순이. 순이의 얼굴을 살피며 서서히 제정신을 찾아가는 상길. 제정신이 돌아온 상길이의 뺨을 써니는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그리고 흐느꼈다. 상길이는 대답 한 마디 없이 써니의 오른손바닥이 자신의 왼쪽 뺨을 때리도록 내버려 뒀고, 바닥에 무릎 꿇고는 오열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목적을 이룬 순이. 그런데, 실은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써니. 아내를 향한 분노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베트남까지 오게 된 기구한 남자 상길. 영화는 멍하게 앞을 바라보는 써니/순이와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군 채 흐느끼는 상길의 모습을 차분하게 비추다 끝난다.

 

     감독 이준익 선생이 말했다. "'님은 먼곳에’는 페미니즘(여성주의) 영화가 아니라 페미니티(여성성)에 관한 영화예요. 페미니티가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죠. 20세기까지의 역사가 남자의 입장에 선 ‘히스토리’였다면 21세기는 ‘허스토리’로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어요." 나는 이 영화를 순이가 써니를 발견하는 과정, 써니가 순이를 받아들이는 과정, 순이가 써니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동시에 발생하는 '개성화 과정 individuation'으로 읽고 싶다. 할머니가 아닌 대중 앞에서, 그것도 가장 성적 욕구가 강렬한 젊음의 상징인 군인들 앞에서 노래하면서 순이는 자기 속에 숨겨진 써니를 발견했고, 개발했고, 그렇게 변해가는 자기를 즐겁게 수용했다. 냉정한 현실 앞에서는 냉정하게 대처하는 법도 배웠다. 삶과 죽음 사이가 거리감을 느낄 수 없는 전쟁터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기 위한 아내의 대범한 결단에 유교적 잣대를 가져다 되는 남자가 있다면, 마음이 갑갑해진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남편의 나약한 모습을 직시한 순이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어린아이 같은 남편을 대범하게 체벌했다. 아들의 일이라면 모든 걸 희생하려는 도를 넘어선 시어머니처럼 남편을 대하지 않았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라."는 예수의 말을 우린 참 많이도 곡해한다. 자기를 포기하여 남을 사랑하라고? 난 기회가 올 때면 망설임 없이 항변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남을 사랑하기 이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다. 순박한 시골 새댁 순이는 베트남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역시나 아내가 나보다 강하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그래, 역시나 여자는 남자보다 강했고, 지금도 강하고, 앞으로도 강할 것이다. 약한 놈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놈이 강하다고 떠든다. 남자의 역사 history는 이미 이를 반증한다. 남자의 역사 history를 좌지우지 한 이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기 시작한 때부터 여자였다. 남자의 역사 history는 여자의 역사 herstory를 뒤집어 읽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남성성의 거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