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9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주현 후 제4주: 녹색)
말씀: 요한복음 5:1~15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알게 될 때까지는
어제가 음력 설이었는데요. 어떻게 설날 하루 잘 보내셨나요? 정유년 닭의 해가 시작했습니다. 미국 사람은 닭을 떠올리면 닭튀김만 생각할 텐데, 한국 사람은 옛부터 닭을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 시간을 관장하는 십이지신 중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한국 사람도 닭을 맛있게 요리해서 잘 먹었습니다. 닭볶음탕,찜닭, 불닭,닭냉채, 삼계탕 등 닭으로 할 수 있는 요리는 참 많죠. 우리 조상들은 닭을 시작을 알리는 영험한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새벽이 되면, 그러니까 밤새 세상을 지배했던 어둠이 물러가고 밝음이 세상을 감싸 안기 시작하면, 닭은 “꼬끼옥!”하고 울었습니다. 새벽을 알리는 날지 못하는 새. 하루 삶의 시작을 알리는 땅에 붙어서 사는 새가 닭입니다.
양력과 음력 이렇게 설을 두 번 새려면 어느 곳에 더 강조점을 두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박이 생기곤 합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 조선 문화 말살 정책으로 양력설을 한국에 가져왔습니다. 편의상 양력설을 신정,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불렀죠. 일본 정부는 음력설 새는 걸 금지했는데, 세배하러 다니거나 설빔을 차려입은 사람에게는 먹물을 뿌렸고, 음력설 전에는 방앗간 영업을 정지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는 음력설을 다시 제자리에 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양력설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죠. 설을 두 번 다 쉬면 공장이 멈추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은 양력설보다는 음력설을 지켰습니다. 수 천 년간 살아온 삶을 몇 십 년만에 완전히 바꿀 수는 없는 일이죠. 음력설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 건 1987년 반독재 민주화 항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음력설을 되살려야 한다는 국민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고, 1989년 음력설을 설날이라 지정하고 섣달그믐 (음력 12월 마지막 날)부터 음력 1월 2일까지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이제 미국에 들어와 산 지가 10년째 됩니다.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밀려오는 아쉬움과 씨름해야 합니다.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물론 늙어가는 상태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 함께 늙어가는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기 때문이고, 마음속 한 쪽에 애잔하게 남아있는 설날과 관련한 추억을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는 두 아들에게는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보고 해보는 게 나은데, 미국에서는 음력설, 그걸 해 줄 수가 없죠.
요한복음 속에 담긴 예수님은 시간에 아주 민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이적이라고 알려진 가나안 혼인 잔치. 그곳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걸 먼저 눈치챈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에게 다가가 넌지시 도와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아직 그럴 때가 아닙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와 당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할 때, 연거푸 하나님의 시간에 관해 설명하셨습니다. “계획한 걸 하나둘 실행에 옮기고 있지만, 그게 완벽하게 성취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기다리자.” 이게 요한복음에서 담긴 예수님이 이해한 하나님 나라의 핵심 운영 원칙입니다.
요즘 전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아침에 지누랑 지누보다 2살 많은 이삭이란 남미계 미국인 아이를 학교까지 데리고 갈 때 축구공을 발로 부드럽게 잘 다루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후회가 되는 걸 지누에게는 해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라고 해야겠죠. 얼마 전 함께 본 전설적인 축구 선수 펠레에 관한 영화가 무척 자극적이었나 봅니다. 축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펠레가 축구공 대신 망고를 발끝으로 통통 튕기면서 훈련했듯이 큰 공이 아닌 작은 공을 잘 다루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지누는 질문이나 의심 없이 한 번에 딱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다!’란 생각이 들어 집에 있던 아기용 축구공을 찾아 아침 등굣길을 축구 연습장 삼아 공을 차면서 걷게 했습니다. 두 명의 사내아이는 서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발로 공을 매만지며 등굣길을 걸어갑니다. 축구공을 주거니 받거니 할 때는 서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무척 진지하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움직입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싫지 않은 전 다양한 훈련법을 혼자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 축구 교실이 끝나고 축구장을 벗어나 차로 걸어가는데 지누가 말했습니다. “아빠, 오늘 저 축구 선생님이 나보고 베리 나이스래요.” 실은 저도 선생님이 자기 공을 주우러 선생님 근처로 걸어가는 지누에게 그 말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녀석은 그 말에 한껏 어깨가 으슥해졌던 거 같았습니다. 축구장을 나와 녀석이 제일 먼저 한 말이 바로 그 말이었거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과도한 칭찬은 쓸데없는 자존심만 부풀립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잠깐 생각한 후 제가 말했습니다.“그래, 선생님이 너에게 베리 나이스라고 말했다면, 그건 네가 진짜 잘한다는 말인데. 좋겠다, 너!?” 지누는 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앞을 바라보며 걸었지만, 녀석의 발은, 아시죠? 아이들이 기분 좋을 때 콩콩 바닥을 차면서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듯 총총걸음으로 달려가는 모습? 그렇게 걷고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5장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문 중 하나인 양 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에서 예수님이 행한 이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베데스다는“은혜 혹은 친절의 집”을 뜻합니다. 은혜와 친절을 베푸는 연못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령한 연못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이른 새벽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연못을 건드려 연못물이 출렁일 때, 제일 먼저 연못물에 몸을 담근 이를 괴롭히는 병이 한순간에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연못 주위에는 병든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병자를 하나님이 저주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데스다 연못은 다가가지 말아야 불결하고 불경한 곳이었죠. 그곳을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살피셨고, 한 사람을 꼽으신 후 다가가 물었습니다. “낫고 싶으냐?” 38년 동안 그곳에 앉아 하루하루 근근이 삶을 꾸려온 한 남자는 예수님께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의지조차 없었습니다. 단호하고 위엄있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네 침구류를 들고 걸어가라!” 그 순간 그 남자는 일어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의 침구류를 챙겨 들고 걸어갔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난 기적 이야기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사실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마침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는 안식일에 침구류를 들고 길을 걸어가는 그 남자를 불러 세워 다그쳤습니다. “왜 안식일에 침구류를 들고 가느냐? 너 뭐하는 녀석이야?” 그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날 일으켜 세운 이가 이걸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누구냐?” “모르겠습니다.” 그는 다시 걷게 된 기쁨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일어나 걸어라고 말한 이를 까마득히 잊었습니다. 얼마 후 성전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보기 좋네. 이젠 죄짓지 마라. 그러지 않으면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때 그 남자는 자신을 고쳐준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지누는 하루가 다르게 느는 축구 실력이 저 스스로 만든 거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마음으로 인해 자신감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직은 모르겠죠. 말을 해도 모르겠죠. 녀석의 자라나는 실력은 실은 자기를 가르쳐주는 선생님, 선생님께 자기를 데려다 주는 엄마랑 아빠, 녀석에게 연습 상대가 되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지금 지누는 설명해도 모를 겁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그래서 기다리셨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잘못을 못 본 척 눈감거나 운명을 탓하며 삶을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이 자라길 기다리시며 당신이 해야 할 바를 묵묵히 해나가셨습니다. 그런 후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말씀하셨죠. 더는 잘못된 삶을 꾸려가지 말라고. 2017년 한 해 예수님처럼 우리가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이 현실이 되는 때까지 기다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닌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검질기게, 묵묵하게, 꿋꿋하게 해나가는 그런 힘찬 기다림을 지속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예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무작정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38년 동안 걷지 못했던 이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기다림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다시 걷게 된 그의 마음과 몸이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도망치는 기다림이 아니라 당신이 해야 할 바를 하나둘 차근차근히 해나가며 시기적절한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2017년 한 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다리겠습니다. 무작정 뛰어나가지도 않겠습니다. 나섬과 물러섬 사이에서, 아니 이 둘 사이를 오가며 당신의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우리가 꾸려가는 삶의 참모습을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손자, 손녀들이, 우리의 친구들이,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기다렸는지를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