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7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강림절 제1주: 보라색)
말씀: 학개 1:3~11
(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잘못된 기다림
지난달 드류신학대학원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하나 열렸습니다. 한국 감리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헨리 G. 아펜젤러 목사님 조각상이 대학원 건물 앞에 세워졌거든요. 한국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아펜젤러 목사님 내외분이 한국에 건넨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목사님의 모교인 드류신학대학원에 아펜젤러 목사님 조각상을 봉헌했습니다. 무슨 그리 중요하고 대단한 행사일까란 의구심과 함께 뭐 돌아가신 아펜젤러 목사님 조각상을 만들어서 드류 대학교 교정에 세우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란 빈정거림 또한 생겼습니다. 행사 당일 전 드류 대학교 역사박물관에서 일을 해야 했기에, 자연스레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조각상 봉헌식이 끝난 후 정동교회 교인들을 위한 역사박물관 관람이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 관람 준비를 마친 후 관람 시각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기에 도서관 직원에게 물어본 후 봉헌식이 진행 중인 드류신학대학원 예배당으로 갔습니다. 마침 아펜젤러 목사님의 외증손자인 한 어르신이 아펜젤러 목사님 가족을 대표해서 인사말을 전하는 중이었습니다. 잠시 후 아펜젤러 목사님 조각상을 직접 제작한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는 조각가 김창곤 장로님이 조각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장로님은 아펜젤러 목사님의 얼굴을 복사하기보다는 아펜젤러 목사님의 삶을 조각상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장로님은 구할 수 있는 모든 아펜젤러 목사님 사진을 구해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핀 후 그 모든 사진 속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아펜젤러 목사님의 특징을 조각상에 담아냈습니다.
봉헌식이 끝난 후 드류 역사박물관으로 정동제일교회 교인들이 찾아왔을 때, 아주 잠깐 김창곤 장로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여쭈었습니다. “장로님, 전 조각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사람이지만 장로님이 만든 아펜젤러 목사님 조각상을 보면서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여쭤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음… 아펜젤러 목사님 조각상에 장로님 얼굴이 보이던데, 일부러 그러신 건가요?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셨습니까?” 장로님은 말없이 씩 웃으시면서 잠깐 생각에 잠기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창조란 있을 수 없어요. 아펜젤러 목사님 사진을 모두 구해서 연구했습니다. 선한 힘과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그분의 얼굴을 조각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고 힘이 났어요. 그런데 말이죠. 목사님 사진을 보고 판단하는 이가 저였죠. 그러니까 저라는 사람의 판단 기준을 전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그게 창조인데, 창조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이에요.” “아, 네…” 아펜젤러 목사님 조각상을 바라본 저의 아니꼬운 시선은 한순간에 교정되었습니다. 돈 잔치, 지위와 능력 뽐내기, 권력놀이, 자랑질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삶의 경험과 의미가 될 수 있음을 그 순간 경험하여 깨달았습니다.
학개 예언자는 벨사살 왕이 죽은 후 다리오가 왕위를 이어받아 바빌론을 통치할 때 활동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같은 시대를 산 예언자 중 한 명이 학개입니다. 다리오 왕이 바빌론을 다스실 때, 이스라엘 민족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종교활동이 허락되었고 이때 이스라엘에서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운동이 시작했습니다. 예언자 학개는 학개서에서 시종일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성전 건축을 독려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성전 재건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계 초대형 교회 50개 중 25개가 있는 나라.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성장을 이룬 나라. 미국 다음으로 전 세계에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 이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잘 아시죠? 한국입니다. 하지만 1995년을 기점으로 한국 기독교의 성장률은 정지했고 서서히 시작한 감소율은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처럼 한국 교회에서도 젊은이와 어린이를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를 향한 쓴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자랑거리였던 초대형 교회를 더는 자랑거리로만 볼 수는 없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한국 경제가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한국 교회 내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수평 이동이라고 이름 붙여진 비기독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상황이 아닌 작은 교회에서 중형 교회로, 중형 교회에서 대형 교회로 옮기는 기독교인의 수만 점점 늘어납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찾기 위한 다양한 종교 사회학적 연구가 행해졌습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했기에 다양한 답을 찾아냈지만, 조금 냉정한 눈으로 이 다양한 답을 종합하면 한 가지 공통분모를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종교는 경험하는 대상이 아니라 넘쳐나는 시간을 조금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한 시간 때우기란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소비 거리로 변했습니다. 즉, 교회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마음의 연장선에서 사람을 만나는 경험과 실험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마음도 돈으로 손쉽게 사고파는 종교 시장으로 변했습니다. 종교시장에서 사람들은 구멍가게보다는 백화점을 선호합니다. 다양한 활동 거리와 잘 갖추어진 예식이 있는 교회가 사람들은 자신의 됨됨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를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 붙은 상표와 비슷하게 생각하는데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학개서는 여느 예언서와 다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을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되는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바빌론에서 노예살이 시작했을 때,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지는 않았습니다. 소수의, 사실 이 소수가 얼마만큼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소수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에 남아 곡식과 동물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정확히 얼마나 오랫동안 이들이 무너진 이스라엘 성전을 바라보며 살았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학개서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개 1:2)
이스라엘 민족은 성전을 재건축해야 함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걸 잘못된 기다림으로 정의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학개서 1:5~7)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걸 바쳐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어야 한다로 들릴 수 있습니다. 많은 수확을 거두고 싶고,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싶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를 두 번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설명은 학개서 1장 8절에서 10절에 걸쳐 담겨있는데, 부드러운 번역으로 인해 본래 의미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구절을 직설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왜냐고? 여기저기 분주히 다닐 때 너희는 네 집 걱정만 했지 황폐해진 내 집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게 이유다. 너희들의 인색함이 이유다. 그래서 너희에게 여름에 가뭄을 주어 수확량을 줄였다. 다른 이를 생각하지 않는 너희의 인색함에 맞추어 가뭄을 선포하여 농지와 언덕을 말렸고, 정원과 과수원은 시들어 죽게 했고, 채소와 과일의 성장을 방해했다. 아무것도, 남자도 여자도, 그 어떤 동물이나 농작물도 자라나질 않을 거다.
이스라엘에 남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성전을 재건축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바벨탑 같은 분열의 씨앗이 되는 화려한 교회를 보고 싶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있는 자리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일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판단 기준을 좀처럼 쉽게 넘어설 수 없으므로 그럴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따로 떼어 내어 그 공간을 찾아 우리가 우리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에 부닥쳐 갈등의 늪을 헤맬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전입니다. 성전은 삶의 파도에 떠밀려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갈 때, 그저 하나의 건물에 불과한 성전이지만, 우리의 마음가짐은 일상을 넘어 성스러운 공간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일상과 초월 사이를 들락날락하게 해주는 영적 문지방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강림절 첫 번째 주일에 잊고 있었던 혹시나 무너졌던 우리 마음속 성전을 다시 쌓아 올리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학개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온 성전 재건축에 대한 당신의 말씀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재건축해야 할 성전은 화려한 바벨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재건축해야 할 성전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소음 많고 공해 많은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작달막한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회복의 연장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함도 알았습니다. 이번 한 주 당신의 찾아옴을 기다리며 우리 마음속에 성전 재건축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