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에 앉아서

2016/08/29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8. 30. 09:27

(성령강림 후 제15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일상으로의 초대


      지난 한 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한 한 주였나요? 아니면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텅 빈 마음 멍한 머릿속을 무기 삼아 하루 또 하루 버텨낸 한 주였나요? 지난주를 마지막으로 올여름 휴가는 이제 끝이 났을 텐데요. 휴가도 잘 다녀오셨죠? 아시다시피 휴가(休暇)는 한자 말입니다. 쉴 휴와 틈 가가 합쳐져서 만들어졌죠. 쉬는 틈, 쉬어가는 시간이 바로 휴가입니다.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기 위해서는 쉬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휴가는 떠나는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쉬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이 모이는 휴가 명소는 찾아가는 길 돌아오는 길 내내 교통체증에 시달려야 하죠. 조용한 곳으로 알고 갔는데, 가보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밤새 고성방가에 시달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전 지난주 목요일 아이 둘과 함께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처음엔 그걸 노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건 진짜 휴가였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제 처는 드류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전 집에서 아이 둘과 하루를 보내야 했죠.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챙겨 먹인 후 각자에게 내준 숙제를 잘하는지를 감시했습니다. 그런 후 원래는 집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국립공원 등산로를 한참 걷고 오려고 했었는데 첫째 녀석의 강력한 반발로 집 근처 산책로를 외발 롤러스케이트 (소형 스쿠터), 제가 어렸을 때는 씽씽하면 모두가 알아들었는데, 국어사전에는 그 말이 오르지 않았더군요. 어쨌거나 그 외발 롤로 스케이트를 타고 달리기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아이들이 힘들다고 하면 쉴 때 먹을 몇 가지 간식거리와 장난감을 넣은 가방을 등에 멘 후 각자의 스쿠터에 오른 우리는 산책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산책로는 제가 사는 동네와 옆 동네를 가로지리는 숲길이었습니다. 다행히 포장도로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저와 두 아들은 집에서부터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한 세 시간이 넘는 왕복 거리를 씽씽을 타고 열심히 달렸습니다. 마흔이 몇 년 남지 않은 중년의 남자가 아이 둘과 함께 씽씽을 타고 산책로를 달린다는 게 다른 사람 눈에는 이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열심히 달렸습니다.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은 축구장, 농구장, 야구장이 모두 완비된 옆 동네 시민 운동장이었는데요. 그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도 있어서 둘째 녀석은 거기서 한참 놀았습니다. 물론 그동안 첫째 아들과 저는 서로의 멱살을 꽉 붙잡고 유도 던지기 기술을 연습하며 서로의 동작이 틀렸다며 실랑이도 벌렸죠.


휴가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죠. 제대한 후 삼 개월 정도 일했던 이동전화기 기지국 설치 막노동이 생각나네요. 작업을 인도하던 어르신 입에서 간식 먹으면서 잠깐 쉬자!”란 말이 나올 때가 어쩜 그리도 좋던지요. 고되고 힘든 일에서 잠시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었죠. 두 아이와 숲길을 달리는데, 참 많은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제 눈앞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보니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하게 청소된 거 같았습니다. 휴가의 참된 묘미는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이죠. 매일 하는 일로부터 우리 자신을 의도적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이죠. 매일매일 직장 상사의 눈치를 살피고, 옆에 함께 앉아 일하는 사람을 경계하며 사는 일상은 그리 마음 편한 곳이 아니죠.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가능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사는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열심히 아주 열심히 노력하며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상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일상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고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일상과 분리된 종교는 제도화와 관념화를 거쳐 최종적으로 박제화를 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이죠. 종교의 제도화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를 분리합니다. 물론 힘과 권력은 하나님의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주장으로 성직자가 가지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관념화는 일상에서 경험해야 할 하나님을 머릿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지켜야 할 법규와 원칙이 자꾸 생겨나고 율법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기보다는 점점 더 멀리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박제화된 종교는 우리에게 힘과 자유를 건네기보다는 우리를 족쇄에 매어 노예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생동감으로 우리 속에서 살아있는데, 박제화된 종교는 우리에게서 이 생동감을 빼앗아갑니다. 제도화, 관념화, 박제화된 종교의 끝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초월(超越: 어떤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음)입니다. 거듭 이야기했듯이 우리 삶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으로부터만 참된 종교심은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도망가고 싶은 것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는 건 참된 종교심이 아닙니다. 참된 종교심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에 시작합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옳음을 주장했던 욥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그가 인간이라면 누구도 쉽게 이길 수 없는 아집(我執: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워 버팀)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아집을 악마 혹은 사탄이라 불렀습니다. 악마와 사탄이 무서운 이유는 아집이 불러올 재앙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14장은 지난주 함께 읽고 곱씹었던 누가복음 13장과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다 십팔년 동안 몸이 굽은 채로 산 한 여인을 발견하여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지켜본 종교 지도자들이 안식일에 일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비난하자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을 살리는 일임을 강조하셨고, 곧이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바리새파 지도자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는데, 그곳에서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수종병을 낫게 해주셨는데, 역시나 이를 훔쳐본 종교지도자들은 기회다 싶어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에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한 예수님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신 후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8~11)

      

       철학자 니체는 이 구절을 읽은 후 인생을 현명하게 잘사는 방법으로 올라가고 싶으면 내려가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날렵한 처세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 예수님께서 이런 얕은 꼼수에서 비롯된 얄미운 처세술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이 이야기를 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를 알고 싶으면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러한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을까를 먼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에 예수님은 손님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초대받아 간 집에서 다른 사람이 많았는데, 표현은 안 했지만 예수님을 향해 적대감을 품은 사람이 많다는 걸 예수님은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리새파 집에 들어가 높은 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를 찾아 앉은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을 겁니다. 그런 낮은 자리가 아니고서야 예수님은 수종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높은 자리는 앉을 사람이 누구인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제도화된 자리죠. 높은 자리에 가면 맘에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척 해야 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재미있다고 웃어야 합니다. 관념화된 자리죠. 높은 자리에 가면 우리 본래의 모습을 감추어야 하는 경구가 많습니다. , 우리 자신을 박제로 만들어야 합니다. 반대로 낮은 자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본연의 자신을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또한 제도화되어 있지도 관념화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빌뱅이 언덕」이란 수필집에서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님은 가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한답니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으시죠? 권 선생님은 우리 배가 고플 때만 다른 사람 배도 고플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으로 굶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을 줄 안답니다. 먹을 게 없어 주린 배를 달래본 사람은 먹을 게 없는 다른 사람이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걸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는 삶을 꿈꿉니다.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는 삶을 희망합니다. 점점 더 많은 걸 소유하는 삶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삶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참사람의 수를 줄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보낸 예수님이 일상으로 돌아와 처음 한 일은 사람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참 사람을 찾고자 예수님은 여기저기로 다니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사람을 만나고 싶거든, 참살이를 경험하고 싶거든, 살면서 높은 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를 찾아다녀라.” 이 말이 참말인지 거짓인지를 실험해 보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을 찾아 거하는 한 주를 만들어 보세요.


 

기도


하나님, 낮은 곳을 찾는 우리의 마음은 낮은 곳을 취함으로써 높은 곳을 쟁취하겠다는 아집이 되지 말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참살이를 위해서, 참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이번 한 주 낮은 곳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