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민이가 불혹에 접어들던 날 (2020년 11월 20일 금요일)
"당신 이번 선물에는 뭘 가지고 싶어요?"
"글쎄요. 딱히 가지고 싶은 게 없는데..."
"그래도 당신 생일인데, 뭐라도 가지고 싶은 게 있었으면 하나 사야죠."
"그럼, 하나 있긴한데..."
"뭐죠?"
"청소기. 엘지에서 나온 거."
"그건... 괜찮습니다!"
처와 난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2020년 11월 20일 처는 마흔에 접어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이현민이란 이름의 여자를 만난 지 19년이 지났다. 난 아직도 내가 현민이를 처음 만난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붉은색과 보라색 중간쯤 되는 색깔 립스틱이 칠해진 아담하면서도 동그랗게 다물어진 입술은 옆자리에 친구가 앉자마자 화사하게 벌어지며 웃음으로 바뀌었다. 참하게 빗어 내린 단발머리. 원래 머리카락 색깔이 갈색끼가 다분한지는 몰랐다. 창문을 통해 스며들던 아침 햇살은 현민이 머리카락의 갈색끼를 한층 더 강조하여 갈색으로 진하게 염색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있었고,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하얀 살결을 확인할 수 없게 검은색인지 짙은 회색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겨울용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권희순 교수님이 들어오셨고 현민이의 웃음끼 어린 눈은 교수님을 향했다.
첫눈에 반했던 그녀와 결혼하여 살아온 세월이 이제 햇수로 15년이다. 행복과 불만, 짜증과 분노, 경멸과 체념, 후회와 반성, 각오와 다짐이란 온갖 다양한 감정의 수레바퀴를 따라 삶이란 길을 함께 걸어온 게 어느덧 15년이다. 지누(지혜로 지은 조그만 성)와 미누(아름다움으로 지은 조그만 성)을 만드느라 예전처럼 아담하고 날씬한 몸의 형태는 사라졌지만 아름다움은 세월과 함께 무르익어간다. 작년에 내가 드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여전히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있는 날 미워할 만도 한데 그러지도 않는다. 그런 날 변함없이 지지하고 아껴준다. 두 아들은 그녀에게 있어서 삶의 일부분과 같다. 아무리 피곤해도, 짜쯩스러워도 아이들이 무언가를 해달라고 요구하면 이를 들어주려고 애쓴다. 내 엄마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뜻한 엄마, 좋은 엄마, 이해심 많은 엄마를 난 결혼한 아내로부터 경험했고, 그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어린 시절 경험하지 못했던 항상성과 지속성을 내면화했다.
그녀에게 부끄러운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참 열심히 공부했고, 주어진 일에 성실하려 노력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은연중에 떠올랐다. 배운 거 없었던 당신, 할 줄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았던 당신. 아버지는 운전대를 붙잡고 삶의 길을 달리셨다. 멈추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도 책을 붙잡았고 쉬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며 보낸 시간이 어느덧 20년 가까이 된다. 안타깝게도 책장을 넘기며 보낸 시간은 내게 건네준 게 별로 없는 거 같다. 감동을 받았던 글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혔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지만, 현민이는 내 옆에 지금까지 있어줬다. 내 삶에서 가장 분명하게 몇 가지 있다면 부모님(내 생명의 근원), 내 두 아들(내 삶의 흔적), 현민(내 삶의 동반자)이다.
현민이가 불혹에 접어들던 날 지누와 미누, 난 편지를 썼다.
미누:
Dear Mom,
Buttman here. Here a wonderful life, your 40 years old, congrats.
1. Tips and,
2. Do 10 push-ups,
3. 10 sit-ups,
4. Keep going.
Try to lose 살살. PS lose some 살살, okay? For your health. 살살.
From the Buttman. Let's go!
지누:
엄마에게,
엄마, 생신 축하합니다!
저를 어릴 때부터 매일매일 돌봐줘서 감사합니다. 화날 때는 화난대로, 슬플 때는 슬픈 대로, 기쁠 때는 기뻐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너무 좋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하고 아빠를 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은 한 번도 안 만났습니다. 제가 손가락도 혼자 못 움직였을 때도 같이 있어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40년을 살아서 축하해요! 엄마는 아직 할머니라고 불릴 수 없고 젊은 사람이라고 불릴 수도 없습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기쁘게 살면 기쁜 일이 있을 겁니다.
이지누 올림.
광유: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멋지긴 하지만 너무 많은 해석이 있기에 영 미덥지 않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고, 모르기에 무슨 말이든 해야 자격지심이라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죠. 좋아한다는 건 부담이 없다는 말이지요. 같이 오래 있어도, 트림이 나오면 트림을, 방귀가 나오면 방귀를, 졸리면 하품을, 눈곱이 양 눈 안쪽 가장자리에 끼어 있으면 끼어있는 대로, 안고 싶으면 꼭 안고, 안기고 싶으면 다가가 안기고, 짜증 나면 짜증 좀 부리고, 화나면 화내고, 화내고 있으면 살짝 쌩까고, 싫은 일이 있으면 싫은 마음을 옮기지 않으려고 마음 단속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꼭 함께 누구보다 먼저 나누고 싶고,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 자라고 무르익은 신뢰와 존중, 기댐과 기대어짐이 조화를 이룬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좋은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당신의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당신을 처음 이 세상에서 만난 지도 어느덧 햇수로 20년이 되었습니다. '운명'이란 게 정말 있을까요? 천만년이란 영겁의 세월을 지나 이승에서 난 드디어 당신을 만나 함께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선한 인도가 우리를 1980년부터 지금까지 여기로 이끈 걸까요? 난 모. 르. 겠. 습. 니. 다. 그저 쉽지 않은 삶이란 돛단배에 당신과 지누, 미누가 나와 함께라는 단순한 사실에 가슴이 벅차면서도 시리고, 설레면서도 아련함이 감돕니다. 사랑하고, 축하합니다!
2020년 11월 20일 이현민 생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