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2015): 적응과 습관, 분노, 그리고 용서
영화 <<룸>> - 적응과 습관, 분노, 그리고 용서
오스트리아인은 아돌프 히틀러와 버금가는 악인으로 요제프 프리츨을 꼽는다. 그는 자신의 셋째 딸 엘리자베스는 열여덟 살 때 지하실에 감금한 후 24년 동안 지속해서 성폭행했고 그런 와중에 일곱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처 로즈메리와 다른 여섯 명의 자녀는 집 지하실에서 24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아일랜드계 캐나다인 작가 엠마 도너휴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 <<방>>을 창작했다. 그리고 영화감독 레니 에이브러햄슨은 이 소설을 영화 <<룸>>으로 만들었다.
벽면에 온통 낙서와 그림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허름한 방 한 칸에 조이와 아들 잭이라는 이름의 딸처럼 보이는 아들이 하루를 시작한다. 이들이 삶을 꾸려가는 곳은 조이가 17살 때 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감금된 방이다. 조이는 7년을 그 조그만 방에서 살았다. 밤마다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그 남자는 찾아왔고 그러다 태어난 아이가 잭이다. 잭은 자신의 다섯 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엄마가 달걀과 밀가루를 섞어 만든 생일 케이크가 영 마음에 안 든다. 생일을 기념하는 초가 없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고, 엄마는 내년 여섯 살 생일 때는 초가 꽂힌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날 밤에도 늙은 남자는 어김없이 조이를 찾아왔다. 먹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서. 그 아저씨가 엄마와 함께 있을 때면 잭은 벽 속 옷장 안에 들어가서 잠을 잔다. 궁금해서 옷장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지만 잭은 그게 무엇인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다. 항상 그래 왔기에 뭐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익숙함만큼 무서운 것은 없지만 익숙함 만큼 또 그 무서운 걸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 또한 없다.
마르크스는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정의하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는 상황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고 말했다. 조이는 가로세로 3.5M 방에 감금되는 순간부터 그 좁은 방에 적응해야만 했다. 살아야 하니까. 그 방에 들어오기 이전의 삶은 마음속에서 지워야 했다. 새로운 존재, 곧 가로세로 3.5M짜리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태어난 잭은 가로세로 3.5M를 세상으로 알고 살아간다.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 텔레비전이지만 화면 속에 비친 세상을 환상이라 믿는다. 태어나 자란 세상 외에는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므로.
적응과 습관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칙>>이란 책에서 인류의 문명을 자동차로 비유할 때 습관을 동력 전달 장치의 핵심인 크랭크축에 비유했다. 잭이 태어난 가로세로 3.5M짜리 방은 좁고 갑갑하다. 하지만 조이는 그곳에서의 삶에 빠르게 적응했다. 잭의 엄마가 된 이후에는 살아야 할 목표 또한 생겼다. 17살 소녀는 납치, 감금, 거듭되는 성폭행에 적응했다. 부적응은 죽음을 의미했다. 반항하거나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할 때면 한동안 전기와 음식 없이 살아야 했다. 어느 날 밤 자신을 납치한 중년의 남자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자기에게 고맙다고 말하라고 명령했다. 조이는 고맙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변했고 피해자는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되었다. 적응은 습관을, 습관은 새로운 사람을 창조한다. 조이는 3.5M짜리 사람이 되었고, 3.5M가 조이의 세상이 되었다.
분노
잭의 다섯 살 생일이 지난 어느 날 조이는 잭을 진짜 세상에 내보내기로 마음 먹는다. 아이가 ‘일상’이 무엇인지를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잭에게 죽은 시늉하는 법을 가르친 조이는 자신을 감금한 남자에게 잭이 감기로 죽었으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카펫에 말린 채로 트럭에 실린 잭은 엄마가 말한 대로 차가 정지 신호에서 멈추었을 때 탈출을 시도했고 행인의 도움으로 경찰에게 넘겨진 조이는 엄마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조이가 어떻게 집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한 한 여자 경찰관은 상황의 심각함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로써 조이는 7년 만에 부모님과 다시 만났다. 부모님은 별거 중이었고, 멀리서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조이를 껴안고 한없이 울었지만 조이가 낳은 아이 잭을 자신의 손자로는 인정할 수 없었다.
조이는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7년이란 세월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그녀의 삶은 17살 때 멈추었고 지난 7년간 그녀가 산 곳은 일상이 아닌 ‘가로세로 3.5M’ 짜리 방이었기 때문이다. 3.5M짜리 방에서 그토록 바랬던 삶이 일상에서의 삶이었지만 일상은 너무 낯설었다. 3.5M짜리 방에서 만나 함께 산 잭은 삶의 모든 것이었지만 일상에서 잭은 그녀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다.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잭에게 보여주다 불쑥 서글퍼진 조이는 황급히 사진을 다시 상자 안에 담으며 말했다. “그래,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면 돼.” 그 후 조이는 텔레비전 대담에 출현했고 얼마 후 자살을 시도했다.
용서
세상 밖으로 나와 ‘일상’의 삶을 시작한 잭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 가로세로 3.5M짜리 방을 그리워했다.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던 그곳에서의 삶을 그리워했다. 조이에게 그 방은 정신적 외상의 근원지였지만 잭에게는 고향이었고 집이었다. 한 침대에서 잠을 자다 엄마가 옆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잠에서 깨어난 잭은 화장실에서 자살을 시도한 엄마를 발견했다. ‘고향’ 집에서도 엄마의 심장 역할을 한 이가 잭이었는데, ‘세상’ 집에서 죽어가는 엄마를 살린 이도 잭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에게 자신의 힘을 건네주기 위해 잭은 5년간 길어온 머리카락을 자른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어느새 옆집 친구와 마당에서 축구하는 잭을 본 후 생각에 잠긴다. 병원 의사의 말이 맞았다. 잭은 유연했기에 상황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세상을 무서워 한 건 잭이 아니라 자기였음을 확인한 조이가 잭에게 말했다. “잭, 난 네게 그리 좋은 엄마가 아닌 거 같아.” “그래도, 엄마는 엄마잖아.” 잭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잭이 ‘고향’ 집을 방문하고 싶어 했다. 조이와 잭은 경찰관의 호위를 받으며 ‘고향’ 집을 방문했다. “엄마, 왜 집이 쭈그러들었어요?” 세상 밖으로 나온 후 잭은 자랐다. 키가 자라듯이 마음도 자랐다. 잭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던 그 집은 이제 잭이 뛰놀기에는 너무 작았다. 이곳저곳을 거닐며 추억을 더듬던 잭은 망설임 없이 문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이제 안녕이라고 말해야지. 안녕!” 이를 지켜본 조이는 나지막이 말했다. “안녕….”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비가 아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물은 재생을 상징한다. 하얀색은 순결을 상징한다. 재생과 순결을 동시에 상징하는 눈을 맞으며 잭과 조이는 ‘집’을 떠나 ‘세상’을 향해 걸어갔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차분히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걸어갔고, 영화는 끝났다.
영화가 끝날 무렵 잭이 혼자 말했다. 엄마랑 앞으로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걸 경험해 보기로 했다고. 엄마와 함께 버거킹에 앉아서 난생처음 햄버거를 먹는 잭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나도 잭처럼 일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