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 담긴 현실

죽여주는 여자(2016)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9. 1. 5. 20:53


군기지 접대부로 일하다 흑인 군인과 눈이 맞아 동거했지만, 동거남은 허구한 날 자신을 두들겨 패다 한마디 언급도 없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혼자서는 동거남의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신생아를 해외로 입양 보냈다. 세월은 흘렀고, 할머니 나이에 이르자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폐지를 주우러 다니기는 죽기보다 싫어서 박카스를 들고 홀아비들이 서성이는 공원을 찾아 나갔다. 하루 노인 한두 명의 죽지 않은 성욕을 죽여가며 살기 위해 필요한 최저 생계비를 마련했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박카스 아줌마’라고 불렀다.

한평생 남자들의 성욕을 상대하며 일을 했기 때문일까? 할머니는 공원을 서성이는 홀아비들 사이에서 ‘죽여주는’ 여자로 통했다. 그런 할머니에게 어느 날 필리핀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이가 한 명 눈에 들어왔다. 피치 못할 사정에 처해있다는 걸 직감한 할머니는 그 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할머니가 사는 집은 성전환자 여인이 주인이다. 그녀는 야간업소에서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걸로 집 한 채 장만해서 사나 보다. 함께 세 들어 사는 한 지붕 아래 이웃은 다리 한쪽이 없는 장애인 젊은이다. 집 안에 틀어박혀 할 수 있는 일, 아이들 장난감을 색칠하며 입에 풀칠한다. 

영화 전반부를 보면서 ‘박카스 아줌마’의 한 많은 삶을 보여주려나 했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달라졌다. 홀아비들의 죽지 않는 성욕을 죽여주던 할머니가 홀아비들을 정말로 죽이기 시작했다. ‘박카스 아줌마’라도 찾아야 잠깐이지만 누군가를 옆에 둘 수 있던 홀아비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죽고 싶어 했다. 박카스 할머니는 이전부터 자신을 찾아주며 죽임이 끝나면 남들과는 다르게 제법 두둑하게 보수해줬던 할아버지가 심장질환으로 온몸이 마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하러 갔다. 할아버지는 죽고 싶어 했다. 제발 죽여달라고 했다. 박카스 할머니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농약을 할아버지 입에 부어 넣어 죽였다. 치매로 고통스러워하는 할아버지는 산정상에서 밀어 추락사로 죽였다.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다 혼자 죽을 용기가 없는 할아버지는 박카스 할머니에게 그저 옆에서 하룻밤만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줬다. 할아버지는 수면제를 죽을 만큼 먹었고, 박카스 할머니는 하룻밤 푹 잘 만큼만 먹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박카스 할머니는 교도소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누구도 시신을 찾으러 와주지 않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그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소외된 사람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주노동자, 성 소수자, 장애인, 노인. 남의 일 같지 않았다. 20년 후면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으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그 발버둥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치지 않으란 법은 없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영화가 끝난 후 검은색 화면 위로 자막이 하염없이 올라갈 때, 문득 하염없이 삶이란 단어를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