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La La Land (2016)
지난 오 년간 본적 없던 함박눈이 내렸다. 아이들 학교는 다음날 수업을 취소했고, 잠시 후 처와 내가 공부하는 드류대학교도 다음날 수업을 취소한다는 문자를 똑똑한 손전화기가 알려줬다. 둘째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처, 지누, 그리고 나는 영화를 한 편 보고 자기로 했다. 가장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을 보려는데, 지누가 말했다. “아빠, 이거, 친구들이 재미없대요.” “그래?” 오리엔탈 특급 열차 살인 사건 The Murder on the Oriental Express을 보려니, 처가 말했다. “여보, 그거 무섭죠?” 그래서 라라랜드를 봤다.
‘영화 같은 현실’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현실은 거의 항상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실수가 일어나서 현실을 고통으로 바꾸지 않는 한에서는. 그런 현실의 한 부분을 쑥 뽑아내 어떤 방향에서 바라볼지를 결정한 후 다양하게 색칠하고 감칠맛을 더하면 영화 한 편이 된다.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건 잠깐이나마 우리가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현실, 그것도 극적 요소가 가미되어 우리 삶보다 훨씬 신선하고 자극적인 다른 이의 뒤틀린 삶을 엿보기다.
라 라 랜드 La La Land. 뭐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 랄랄라 노래하는 나라? 교통체증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차에 탄 시민이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춤춘다. 무슨 이야기지? 이게 뭐지? 노래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현실로 돌아왔다. 라라랜드는 영화 속에 환상과 현실을 신비로우리만치 조화롭게 버무려 섞어냈다.
커피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 주인공 미아는 영화배우가 되는 게 꿈이다. 재즈 피아노 연주가가 되고 싶은 시배스천은 전통 재즈를 고집하기에 밥벌이가 시원찮다. 또다시 오디션에서 미끄러진 미아는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함께 사는 친구들과 함께 파티에 놀러 가지만, 시끌벅적한 파티장 분위기가 낯선 미아는 집으로 가려고 파티장을 나선다. 맙소사! 길거리에 주차해 놓은 차가 견인 당했다. 할 수 없이 집까지 걸어가다 잠깐 들른 레스토랑. 그곳에서 시배스천은 크리스마스 곡을 연주하며 하루 밥벌이를 하다, 레스토랑 주인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신이 연주 하고 싶은 재즈를 연주한다. 그 순간 미아는 레스토랑에 들어온다. 연주가 끝나고, 레스토랑 주인은 그 자리에서 시배스천을 해고했다. 피아노에 올려 놓은 팁 바구니에 든 돈을 챙겨서 밖으로 나가려는 시배스천을 향해 미아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연주 잘 들었습니다’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났다. 그래서 영화의 첫 번째 장 제목이 겨울이다. 현실은 따뜻하지 않다. 크리스마스지만 여전히 춥다. 그게 겨울이고 현실이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때부터 영화 속 현실은 상상과 교묘하게 뒤섞이기 시작한다. 맞다. 사랑에 빠지면 현실은 뒤틀린다. 새로운 삶의 중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미아와 시배스천은 사랑하며 현실과 상상을 조화롭게 뒤섞으며 서로의 꿈을 향해 달려간다. 번번이 오디션에서 미끄러지는 미아. 전통 재즈를 추구하기에 먹고 살길이 막막한 시배스천. 그런 와중에 봄이 왔고, 시배스천은 안정적 삶을 꾸리기 위해 ‘전통’을 잠시 옆에 내려놓는다. 실력과 마음가짐이 잘 갖추어진 시배스천은 이내 성공적인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 자리매김한다. 이를 지켜보던 미아는 불안했다. 그래서 일인극 공연을 준비했지만, 첫 번째 공연 후 영화배우 꿈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 꿈을 꿨고, 그 꿈이 산산이 조각나자 (꿈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 오직 상상 속에서만 우리는 꿈을 부숴버릴 수 있다) 다시 꿈을 꾼다. 고향으로 도망치는 꿈을.
시배스천은 미아를 찾는 사람이 건 전화를 받았고, 곧바로 미아가 도망간 미아의 고향 집으로 달려간다. 시배스천의 도움으로 미아는 오디션을 봤고, 그날 밤 둘은 어느 언덕 위에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눈다. 미아가 물었다. “우리 사이는 지금 어떻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미아, 그 배역을 따내면 지금까지 이룬 모든 걸 다 포기해야 해. 그리고 그걸 해. 난 언제까지나 널 사랑하고 기억할 거야.”
세월은 흘렀고, 미아는 오래전 자신이 일했던 커피 가게에서 아침 커피를 사서 마신다. 그 가게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는 미아를 우러러 바라본다. 옛날 미아처럼 그녀 또한 영화배우가 되는 게 꿈인 거 같았다. 미아는 프랑스에 가서 훌륭한 영화 배우가 되었다. 결혼도 했고, 예쁜 딸도 있다. 그리고 시배스천은 잊었다.
어느 날 미아는 남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시내로 나가는 도중 심각한 교통체증 때문에 아무 곳에나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길거리에 주차하고 음식점을 찾아 걷는데, 남편이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한 가게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 가게에서 둘은 다시 만난다. 시배스천은 미아를 처음 만났을 때, 연주했던 곡을 연주한다. 음악 속에서, 환상 속에서 둘은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둘은 함께 파리에 갔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결혼하여 아기도 낳고…
음악이 끝나자 둘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더 머물고 싶냐는 남편의 질문에 이제 나가고 싶다고 대답한 미아는 현관문을 향해 걷다 문득 다시 뒤돌아섰다.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에 앉은 채 과거를 음미하던 시배스천은 한순간 미아가 앉아 있던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은 마주쳤고, 살며시 웃으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미아는 계단을 올라갔고, 시배스천은 동료 연주가들에게 새로운 곡 연주를 시작하자는 뜻을 전하는 추임새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영화는 그 순간 끝났다. 시배스천은 현실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환상 속으로 들어갔을까? 시배스천은 환상을 현실로 옮겼다. 미아에게 약속했던 전통 재즈 클럽을 만들어서 운영했으니까. 미아는? 미아 또한 환상을 현실로 옮겼다. 훌륭한 영화배우가 되었으니. 그렇다면, 둘의 사랑은? 환상이었던가? 아니다. ‘참된’ 환상은 ‘참된’ 현실로 통한다. 시배스천의 연주가 끝나고 둘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시배스천은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 미아는 영화배우로. 어쩌면 한국 사람이 느끼는 ‘한스러움’을 다른 나라 사람은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깔끔하게 싱긋이 웃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또 다른 환상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