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셰이프 오브 워터 The Shape of Water (2017) - 사랑의 모양이라?
목에 이상한 상처가 있는 한 아이가 강가에 버려졌다.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언어장애를 지닌 이 소녀의 이름은 엘라이자Elisa다. 볼티모어 미 항공우주 특수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엘리사는 아래층이 영화관인 건물 아파트에 세 들어 산다. 엘라이자의 삶은 무척 단조롭다.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목욕하고(목욕 전 몇 분간 삶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순간을 위한 시간과 방식조차 단조롭다), 일터로 출근한다. 일터로 자신을 날라줄 버스에 오르면 앉는 자리도, 버스 창문에 머리를 대는 방향과 위치도 정해져 있다. 그런 그녀에게도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옛 방식을 고집하여 만화 포스터를 그리는 미술가 질레스다. 둘은 종종 밖에 나가 함께 산책했고, 단골 케이크 가게에 들려 케이크를 사 먹었고, 질레스 집에서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뮤지컬을 보며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탭댄스를 췄다. 화가 질레스의 삶도 엘라이자처럼 단조로웠다. 그의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쌓아둔 같은 종류의 치즈 케이크처럼.
그러던 어느 날 엘라이자는 연구소를 청소하다 수족관에 몸이 묶인 채 감금된 이상한 생명체를 발견한다. 모두가 다 두려워하는 그 신비로운 생명체가 무섭지 않은 엘라이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금씩 조금씩 괴물처럼 보이는 그 생명체에 다가간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그 생명체를 집으로 데려온 엘라이자는 집 아래층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보다 훨씬 더 영화 같은 사랑을 경험한 후 죽는다. 그런데, 영화는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랑은 죽음도 극복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미녀와 야수의 현대판인 거 같았다. 야수를 야만으로 엘라이자를 문명으로 생각해 본다면 영화는 역시나 야만보다는 문명을 긍정한다. 야수는 엘라이자를 통해 문명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안타까운 건 야수는 문명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엘라이자는 야수를 위해 야만 속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문을 틀어 막은 후 물을 받아 물속에서 둘은 사랑을 나누었다. 화장실 문틈으로 새어나온 물은 흘러내려 아래층 영화관 천장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영화도 흉내낼 수 없는 사랑을 자랑하듯이.
영화는 엘라이자의 죽음과 재생으로 끝난다. 야수를 구하려던 엘라이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소생 능력이 있는 야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엘라이자를 데리고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바닷속에서 둘은 서로 한없이 사랑하며 살었더래요.
극적인 사랑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싶은 이는 이 영화를 좋아할 거 같다. 나? 끈기 있는 사랑은 극적이지 못하다. 극적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굵고 짧은 가락 국수보다는 가늘고 긴 짜장면이 더 좋은 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랑을 그리려고 노력한 영화 같다.
아내도 나도 영화가 끝난 후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이런 극적인 사랑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걸 보니. 보는 내내 졸음이 몰려왔지만 한국 영화를 보자는 아내의 요구를 못들은 척 했던 경솔함 때문에 꾹 참고 봤다. "아, 여보,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 오랜만에 재밌게 잘 봤네요." 아첨과 아부. 사는데 아주 필요하다. 특히 집에서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