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속에 끼어 있는 삶

황석영, 「삼포 가는 길 (1973)」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8. 2. 26. 04:51




포로 가는 길을 걷는 세 사람이 있다. 공사장 식당 여주인과 바람을 피우다 주인장에게 들켜 부리나케 도망 나온 떠돌이 막노동꾼 노영달. 도망가는 영달에게 말을 걸어 함께 길을 걷게 된 정 씨. 노영달과 정 씨가 허기를 면하기 위해 들린 서울식당에서 밤사이 도망친 스물둘이란 어린 나이에 벌써 연륜 있는 갈보가 된 백화. 세 사람에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셋 다 떠돌이로 살았고, 셋 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셋 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길 위에서 만난 셋은 길 위에서 떠돌이 공동체를 만든다. 그 순간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캐묻는 이 없지만, 서로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자신의 삶에 비추어 예감할 수 있다. 그래서 독백이 대화로 변했다.


     눈 덮인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세 사람은 잠시 여독을 풀고자 버려진 집에 들어가 모닥불을 피워 추위에 언 몸을 데운다. 얼음길에 미끄러져 발목을 다친 백화를 영달은 등에 업고 기차역까지 걸어간다. 영달과 정 씨는 백화를 고향으로 보낸다. 영달은 비상금 천 원을 꺼내 음식을 사서 백화의 손에 쥐여준다. 백화가 이등병 여덟 명에게 그랬던 거처럼. 개찰구에서 돌아온 백화가 말했다.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


     조그만 섬 삼포로 돌아가려는 정 씨의 머리가 어지럽다. 한 노인이 삼포에서 호텔 공사가 크게 진행 중이란 걸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런 “풍문마저 낯설었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시 또 떠남이다.


“잘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 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상처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결에 정 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기차가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고향을 잃어버린 세 사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어디서도 그 고향을 찾을 수 없는 세 사람. 내 대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내 고향 교회 뒤 ‘똥산’이 사라졌다. 똥개들이 여기저기 똥을 많이 싸놓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름붙인 ‘똥산’은 삼성아파트로 변했다. 전우익 선생님 말씀이 맞다. 불이 난 산은 수십 년만 지나면 다시 푸르게 변한다. 하지만, 밀어버린 산은 수백 년이 지나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는 한국의 옛 모습을 없애버렸다.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 삼천리 금수강산은 옛 조상의 자기기만이었다. 그런데, 그게 또 아니었다. 제국주의로 서구 문명이 한국을 침범하기 전에 세상의 중심은 한국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우리’ 마을이었고, ‘우리’ 나라였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란 말은 열등의식의 승화였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이 삼천리 금수강산이란 말을 되찾을 수 있을까? 


     2018 평창 올림픽에 참가한 북한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북한에서 내려온 응원단 중 한 명은 강원도를 관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우리나라는 가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삼천리금수강산이란 말이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 그 말속에서 건강한 배짱과 당돌함을 들었다. 열등의식은 극복할 수 없다. 승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