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속에 끼어 있는 삶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명상록Meditations」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8. 1. 5. 04:29


 


정효 선생님 때문이다. 한국 문학 번역의 대가인 그는 어느 책에선가 명상록을 여러 번 읽은 후 꼭 직접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책을 드류 대학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매드슨 기차역 근처 헌책방에서 샀다. 역시나 책은 사놓고 언젠가는 읽어야지라고 마음을 다잡은 후 별 생각없이 책장에 꽂아두면 책이 나를 부르는 그 순간이 찾아온다.

 

     솔직히 난 이 책의 마지막 쪽을 넘길 때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말한 글쓴이의 지성에 대해 감탄할 수도, 그 감탄에 공감할 수 없었다. 뭐 그리 대단한 말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한 말을 현실로 옮긴 철학자 황제라고 말한다. 그리스 철학, 특별히 스토아 철학에 조예가 깊었다던 아우렐리우스. 내가 읽은 영어 번역본은 그레고리 헤이스Gregory Hays 씨가 서문을 썼는데, 책 전체를 차분하고 자세하게 요약하여 정리해 준 그의 글이 명상록 전체보다 더 읽기도 이해하기도 쉬웠다.

 

     스토아 철학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여 움직이는 원동력을 로고스logos라고 부른다. 로고스는 이성일 수도 있고, 섭리Providence나 신God이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다. 세상만사는 다 이 로고스가 결정한다. 로고스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속 인과관계the unbreakable chain of cause and effect를 완벽하게 통제한다. 이 철학으로 인생에 접근하려면 우리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시작 전부터 결정되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은 태어나기 전부터 로고스가 결정한다.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건 주어진 삶의 매순간을 천명天命,logos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고통에 빠졌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누군가 죽었을 때도,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로고스의 결정이라고 믿으며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은 로고스의 결정론을 믿고 따르기 전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난 얼마만큼 성공할 수 있는지, 살면서 누구를 만날지, 누구를 속이고, 누구에게 속임을 당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지, 언제 죽을지는 이미 로고스가 결정했다. 이걸 깨닫고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유 의지는 금지된 것에 도전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걸 감사하는 맘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행동이 된다. 도덕적 책임은 로고스가 만든 세상과 이 세상이 흘러가는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려는 의지에서 생긴다

 

     서문에서 그레고리 헤이스 씨는 명상록을 관통하는 몇 가지 주제를 정리했다. 먼저,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죽음에 무척 민감했다. 모두가 다 죽는다. 그러니 삶이 가져오는 시련과 고난에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그 사람도 죽었고, 이 사람도 죽었고, 나도 죽을 거니까. 죽음, 너무 무서워하지 말자. 책 곳곳에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에게 말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나는 계속해서 죽음 별거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하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실은 무척이나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둘째, 자연은 사랑했지만, 인간 삶과 함께 사는 이들을, 그러니까 인간 존재를 역겨워했다. 성경 잠언서 기자의 한탄이 떠올랐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 사람으로 인해 실망을 많이 했을까? 그랬을 거 같다. 황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삶을 부러워하는 이가 어디 한 둘이었을까? 황제의 삶은 멋있어 보인다. 돈과 권력, 명예, 여자. 부족한 게 없다. 가깝게 지내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그 무슨 일을 꾀하고 행하더라도 두렵지 않을 거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꿈꾸는 황제의 삶 이면에는 외로움과 고독함, 두려움이 가득하다는 걸 알고 있다. 황제를 향한 부하들의 감언이설과 아첨은 언제나 개인적 이익을 위한 속임수다. '벌거벗은 왕'이 아니라면 끝없는 아첨은 짜증스럽다.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삶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욕심과 질투로 인해 인간은 점점 겉과 속이 다른 사람, 말과 행동이 틀린 사람이 된다. 아울레리우스 황제는 외롭고 쓸쓸했을 거다. 그래서 그는 끝없이 변하지만 언제나 일정한 원칙을 고수하는, 항상성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연을 가까이 했고, 자신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명상록이라 불리는 책의 원래 제목은 그 자신에게To Himself (Eis beauton)였다. 셋째, 삶을 향한 비관적 견해가 책의 중심 뼈대를 이룬다. 문예 비평가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가 말했다. “명상록을 거듭해서 읽으면 우울증이 생긴다." 역시나 대가는 대가답게 자신이 읽은 책에 관한 평가를 간단명료하게 내렸다.

 

     안정효 선생의 번역가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치밀함의 기원은 그가 살아온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쓴 자전적 수필집 하늘에서의 명상에는 불우했던, 그렇지만 그 불우함을 삶의 일부분으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던, 그가 그려져 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안정효 선생에게 어쩌면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자기 자신에게 쓴 글, 그것도 종교적이면서 비관적이고 동시에 의지적인, 글은 한 가지 종교로 다가갔던 게 아닐까? 운명을 운명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고통 속에서, 비관 속에서도,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야 할 삶의 길은 보이나보다


     난 어떤 길을 끈덕지고 검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까? 38년째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