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에 앉아서

2016/06/19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6. 20. 09:50

(성령강림 후 제5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일상에서의 권능


     요즘 아침밥을 먹을 때면 제가 하는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이티비씨 뉴스를 누리망을 통해 듣는 일인데요. 한국과 미국의 시차를 생각하면 하루 전 한국에 대한 뉴스지만 그걸 통해 한국의 현실을 멀리서나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듣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두 아들 지누와 미누가 한국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가길 바라는 맘도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아이들이 뉴스 진행자의 말을 모두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을 믿고 싶은 거죠. 이제 한 삼 주가량 뉴스를 정기적으로 듣기 시작했는데요. 한 가지 이상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뉴스를 들으면 들을수록 삶이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우발적인 살인 사건, 부정과 부패와 비리가 한국 사회 곳곳에 가득하다는 선입견이 자꾸 생깁니다. 특히나 한 시간 분량 뉴스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정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가 없고 짜증이 납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 부모님이 시청하는 9시 뉴스를 옆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볼 때 목격했던 광경이 고스란히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미워하기에 남이 잘되는 꼴은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게 제가 정치 관련 뉴스를 들으면서 배우는 삶의 기술입니다.

  

      요즘 잠언을 읽고 있는데요.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며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래 이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지혜롭게 살아야지.” 하지만 돌아서고 나면 제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잠언을 읽기 전과 똑같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결혼하여 남편이 되었고 두 아이가 태어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해 또 한 해 나이를 먹으며 이제 곧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말아야 할 나이인 불혹에 이르려고 하는데, 걱정입니다. 도무지 나잇값을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나이를 먹는 만큼 그 나이에 걸맞은 어른스러움을 갖추어야지만 어른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잠언을 읽으니 위로와 평안을 얻습니다. 잠언에 따를 때, 어린아이는 그리고 젊은이는 절대로 지혜로운 삶을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경험도 그냥 경험이 아니라 꼭 쓰라린 실패를 동반하는 경험이어야 하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지혜랍니다.  


지난 주일 전 지혜는 삶의 흐름 속에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 곧 자연의 흐름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자연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자연의 흐름을 역행해야 하고 그 역행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7:22): 근심으로 인해 뼈가 마르는 경험을 한 후에야만 알 수 있는 게 마음속 즐거움의 소중함입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잠언 17:25): 미련한 아들을 가져보기 전에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죠.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잠언 17:14): 다툼으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기 때문에 다툼은 피할 수 있을 때 피하고 그럴 수 없다면 가능한 한 빨리 마무리를 지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언의 구절구절은 지혜 여인과 무지 여인의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이 주전에 하버드 성인발달 연구소에서 발표한 행복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 생각나시죠? 70년 전 보스턴에 살던 15세 청소년 수백 명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이들의 한평생 삶을 연구한 그 연구소는 우리에게 행복을 건네는 게 무엇인지를 경험적 자료를 사용으로 발견했습니다. ‘관계였습니다. ‘인간관계였다. 많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몇 명의 사람과 긴밀하고 오랫동안 유지한 관계였습니다. 잠언에 담긴 지혜로운 삶 또한 하버드 연구소의 연구 결과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이 지혜로운 삶인지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가다 보면 제 마음속에는 한 어린이가 떠오릅니다. 프랑스 소설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쓴 어른을 위한 소설 <<어린 왕자>>가 떠오릅니다. 소행성 B-612에 사는 어린 왕자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 소행성에는 활화산 두 개, 휴화산이 하나, 몇 가지 식물, 보아밥 나무가 있습니다. 어린 왕자는 매일매일 활화산 두 개와 채소, 보아밥 나무를 돌봐야 합니다. 참 단조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지구로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구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자 어린 왕자는 자신의 고향 B-612 소행성을 그리워합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10:1~20절은 예수님께서 한동안 함께 생활했던 열두 제자를 떠나보내는 대목입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신 후 예수님은 제자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이 사는 곳도 아니고 사마리아인이 사는 곳도 아닌 잃어버린 양이 있는 이스라엘 곧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기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예수님의 제자는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그들에게 보여주신 기적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한 중풍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인 예수님 앞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중풍에 걸려 침상에 누워 있는 한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친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는데, 그런 그들을 본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 한글로 안심하라고 번역한 이 구절을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잘한다! 힘내라! 네 믿음이 널 낫게 했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침상에 누운 남자에게 일어나서 걸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못 가 예수님은 이와 비슷한 기적을 두 가지 더 행하셨습니다. 한 관리가 예수님께 찾아와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예수님은 그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때 길을 걸어가는 예수님을 멀리서 지켜본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12년 동안 혈우병을 앓던 그 여인이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저분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내 병이 나을 거 같은데.’ 걸어가는 예수님 뒤에 다가간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죠. 이를 느낀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잘한다! 힘내라! 네 믿음이 널 낫게 했다.” 예수님께서 행한 수많은 기적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기적의 시작은 언제나 예수님을 향해 다가간 사람의 결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 결심의 확고함을 확인하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태복음 10:5~8)


일상에서 우리가 다른 이에게 전해야 할 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입니다. 그런데 이 권능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병든 몸의 고통이 결국에는 완치되는 걸 온전히 경험해 본 이의 마음 상태, 죽을 거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 온 이의 인내와 의지, 마음속을 답답하게 억눌렸던 갈등을 결국 툴툴 털어버리고 새롭게 삶을 시작해 본 이의 마음속 평안을 다른 이에게 건네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걸 다른 이에게 거저 주라고 덧붙이십니다. 우리도 이 모든 걸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걸 거저 받았음을 깨달아 다른 이에게 거저 줄 수 있는 삶, 그게 바로 잠언이 우리에게 꽉 움켜쥐라는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요?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건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잘 추스리는 일입니다. 어린 왕자가 매일마다 했던 일을 곱씹어 볼 일이 있습니다. 끝없이 뿜어져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화산을 잠잠하게 달래줘야 했고, 마음의 욕심을 상징하는 바오밥 나무가 너무 자라나 자신의 벌을 통째로 집어 삼키지 않도록 잘 관리해줘야 했습니다. 아픔과 상처가 마음에서 시작한다면 아픔과 상처를 치료하는 치료제 또한 우리 마음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겁니다. 그걸 찾은 사람만이 다른 이의 아픔과 상처에 도움을 건넬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 예수님께서 건네주신 일상에서의 권능을 마음껏 활용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지혜로운 삶은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각자의 삶을 지혜롭게 꾸려나가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삶이 돈과 명예, 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거 같지는 않는데, 돈도 명예도, 권력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묵상하고 되샘기질한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각자의 일상으로 보내시며 우리가 경험하여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깨달은 바를 다른 이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하루하루 사는 거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내일이란 허상을 쫓기보다는 오늘 이 시간, 이 순간의 소중함을 꽉 붙잡고 늘어지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