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에 앉아서

2017/04/23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7. 4. 24. 09:20

(부활절 제2주: 흰색)

 

 

 

 

말씀: 히브리서5:11~14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제목: 한 걸음씩 (이광유 목사)

 

첫 개업식 날 친절봉사 외쳐대면서 맛도 좋더니, 실컷 놀다가 개학식날 굳은 맹세하더니. 변하더군 흐지부지 사랑이 식듯이 별 가책도 없이, 원래 뭐 그런거 아니냐더군. 늘 새로운 맘으로 널 대해봐 궁시렁 거리지만 말고, 사랑이 시작되던 날 그날처럼 요동쳐대던 처음 마음으로. 아프고난 뒤 시작했던 아침 달리긴 계속하나요? 한 눈 안 팔고 여자친구 잘 해주고 있나요? 뽑아주셔서 고맙다던 그 아저씨들 뭐하시나요? 월요일 아침 고쳐 매던 구두끈은 어때요? 어려웠을 적 맹세했던 그 약속들을 지켜가나요? 우린 끝까지 함께라던 그 친구들 잘 사나요?

 

가수 이승환 씨가 1999년에 발표한 노래 모음집 <The War in Life 삶이란 전쟁>에 담긴 노래 첫날의 약속가사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이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어떻게 한 주를 보내셨습니까?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 부활을 마음속에 깊이 새긴 부활절 이후 처음 맞이한 한 주 다짐대로 각오대로 살아내셨습니까?

 

          지난주 수요일에 전 제 박사과정 지도 교수님을 근처 공항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오전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교수님의 짐을 제 차에 옮겨 실은 후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바로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학교에서 공항에까지 중간 거리에 이르렀을 때, 교수님께서 어머나!”라고 외쳤습니다. 무언가를 까먹고 챙기지 않으셨던 거 거죠. 공교롭게도 그게 여권이었습니다. 그 순간 시계를 쳐다보니 열두 시 이십 분을 막 지나가고 있었죠. “교수님, 비행기 출발 시각이 언제죠?” 세 시쯤이라는 말씀을 들으며 차를 갓길에 세운 후 도로안내기에 등록된 교수님 집 주소를 찾았습니다.

 

          공항까지 가는데 삼십 분 돌아오는 데 삼십 분 한 시간이면 끝날 일이 예기치 않은 일로 세 시간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두서없이 시작한 이야기는 마음이 동하는 대로 주제를 옮겼고 그러다 몇 년 전부터 드류신학대학원으로 유학 오는 한국 학생 중 미혼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현상에 이르렀습니다. 교수님은 세대 차이에 관해 제게 물었습니다. 함께 드류 기숙사에 사는 이십 대 미혼 전도사님들을 가까이서 대할 기회는 그리 흔치 않지만, 전 이분들이 저보다 훨씬 더 사리에 밝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각종 모임과 사람을 만남에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능력이 저보다 낫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제가 그분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순간이 생각났습니다.

 

          몇 달 전 드류 한인학생회에서 이민법 전문 변호사 세 분을 모셔와 이민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저 또한 졸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터라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설명회에 참석했습니다. 40분가량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미국에서 살 수 있는 자격, 영주권을 취득한 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을 설명한 후 변호사 선생님은 질의응답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둘 손을 들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후 변호사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변호사 선생님은 당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최선책을 알려주셨지만, 학생들은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변호사 선생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다시 손을 든 학생들은 누리망을 통해 살펴본 바에 따르면 혹은 다른 사람이 한 말에 따르면이란 전제를 달며 변호사 선생님이 한 답변의 정확성을 검증하고자 했습니다. “가만히 구조대가 올 때까지 배 안에 있어라!”라는 끔찍하리만치 무책임한 세월호 기내 방송이 생각났습니다. 권위에 대한 불신. 오늘 한국의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를 향해 가진 공통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히브리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기상천외한 주장을 펼칩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대제사장의 시조라 불리는 멜기세덱 왕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합니다. 멜기세덱 왕은 아브람과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조카 롯이 다른 민족에게 붙잡혔다는 말을 들은 아브람은 어릴 때부터 군사로 훈련해 온 장정 삼백십팔 명을 데리고 단이란 지역까지 쫓아가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브람은 소돔을 지나가게 되었고, 소돔 왕은 직접 나와 아브람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을 환대하며 축복했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로 아브람은 전쟁으로 쟁취한 물품 중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 왕에게 주었습니다. 십일조의 기원이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왕의 만남이라면 십일조의 본격화는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이 사는 곳으로 가던 중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신다면 자신이 살면서 만드는 재산 중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우리가 자라면서 들어온 충실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한다는 말은 십일조의 기원을 되짚어 볼 때,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니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달라는 논리가 십일조 밑에는 분명히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주고받기 식의 십일조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일상을 열심히 살아서 만든 무언가가 아닌 당신의 삶 자체를 제물로 내려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 말을 과장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룬 모든 걸 과감하게 포기하여 내려놓아야 한다고.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히브리서 5:1~2)

 

          예수님이 희생한 건 소유물이 아닌 마음이었습니다. 이번 학기에 목회 상담 수업 조교로 일을 시작할 때, 담당 교수님이 제게 말씀하셨죠. “학생들에게 좋은 점수를 주세요. 다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좋은 점수를 주세요.” 과제물을 열심히 준비해서 제시간에 제출하는 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열심히 준비하지 않고 제출 시간도 지키지 않는 학생의 과제물에 점수를 매기는 건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학생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보다는 페이스북 같은 각종 사회연결통신망으로 친구랑 이야기하기 바쁜 모습이, 다른 수업 과제를 준비하느라 무척 분주한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 부활 사건은 이 모든 마음의 갈등을 개울을 따라 졸졸졸 흐르는 강물처럼 평온하게 감싸 안는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 예수님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미워했던 만큼 예수님을 닮고자 노력했습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습니다. 너랑은 더는 상종할 수 없으니,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라고 쐐기 못을 박지도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후 그가 한 말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본문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2~14)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결단하여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한 주 또 한 주를 살아가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와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 죽음과 부활로부터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따라 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사소한 한 가지에서부터 예수님의 삶을 흉내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들어주기 싫은 다른 이의 부탁을 밝은 웃음으로 들어주기. 아이의 짜증에 짜증으로 답하지 않고 섬김의 자세로 대답하기. 아내 혹은 남편보다 먼저, 설령 답변 혹은 답장이 늦어질지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기. 가능하면 한 번 꼭 껴안아 주기.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 맞는, 우리 체질에 맞는 부활을 실천하는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겉은 어른인데 속은 여전히 어린아이인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른인데 아이처럼 산다는 게 부끄럽지만 그게 꼭 부끄러운 일이 아님도 깨닫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활절에 가졌던 뜨거움과 거룩함의 다짐이 한 주 만에 연기처럼 사라졌었는데, 그 이유가 너무 커다란 걸 희망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번 한 주는 소소한 일에서부터 당신의 부활을 실천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